[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8장 / 땅을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 (118)

2026-01-21     차형석 기자

‘연(緣)과 연(緣)으로 강하게 이어져 있는 조선의 양반사회에 과연 자신이 비집고 들어가서 맺을 연(緣)의 틈새는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은 한 것인가? 허울뿐인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양민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도산성에는 여전히 일만이 넘는 왜군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올해는 모내기를 포기하고 밭도 일부만 파종을 했다. 해질 무렵에 잠시 내려가서 밭작물들을 돌보고 이내 무룡산으로 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작년에 직산 부근에서 주워온 씨앗을 파종했는데 절반은 죽고 절반만 살았다. 살아남은 것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자라기 시작했는데 벌써 키가 어른보다 더 컸다. 수염처럼 생긴 것이 달려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천동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천동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대신형님에게 서찰과 함께 보냈다.

혈혈단신인 그에게 경사가 생겼다. 천동의 처 옥화가 회임을 한 것이다. 너무 기쁘고 흥분이 돼서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천동은 처인 옥화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무수히 많이 했다. 아마도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백 번을 넘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동은 정말 말로는 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그의 마음 때문에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의원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 정확한 산달을 알 수는 없으나 대략 넉 달은 되어 보였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헛구역질을 하는 걸로 봐서 임신이 확실했지만, 초산이고 친정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셈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려서 그녀는 대략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제 처음 임신한 사실을 알리던 옥화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모습이면서도 유리구슬처럼 밝게 빛나는 행복한 기운을 듬뿍 담고 있었다. 의지할 피붙이가 없던 천동에게 마침내 피붙이가 생기는 것이다. 천동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지아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옥화도 행복한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보부상 서신 13호-



작금의 조선은 양반 사대부들과 지방 토호들의 면천법에 대한 반대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수세에 몰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대놓고 주상에게 면천법과 속오군, 작미법의 부당함을 아뢰고 있었다. 이에 주상도 이 법들의 폐지에 대해서 그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양민과 천민 등 일반 백성들은 양반 사대부들의 눈으로 보면 사냥개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주상에게 있어서 조선팔도의 땅과 거기에 속한 백성들은 그저 쓸모가 있을 때는 사용하고 없어지면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천 년의 역사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이 땅에서 천대받고 수탈당하면서도 꿋꿋이 살아온 백성들은 비록 자신의 소유는 아니지만 조상들이 묻혀 있는 이 강토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