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란의 도서관 산책(12)]국립경주박물관 안 도서관, 신라천년서고
경주는 지금 황금빛 열기로 뜨겁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오는 2월22일까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 열리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금관 6점과 금 허리띠가 한자리에 모인 그야말로 세기의 전시다. 이 찬란한 유산을 눈에 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람객들로 박물관은 연일 북적인다.
그러나 화려한 금관의 위용에 압도되어 넓은 전시관을 걷다 보면 어느새 다리는 무거워지고 눈은 피로해지기 십상이다. 관람을 마치고 편안히 쉬어 갈 곳을 찾거나 전시의 감동을 조용히 음미할 사색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신라천년서고(이하 도서관)가 제격이다.
본관을 뒤로하고 월지관 옆으로 난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박물관의 유물을 보관하던 수장고(收藏庫)였다. 지난 2022년 12월, 사람과 책이 머무는 열린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낡은 콘크리트 뼈대는 그대로 살리되 따뜻한 목재를 덧대어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그려낸 이 공간은 건축물 가치를 인정받아 권위 있는 건축상을 두 차례나 휩쓴 바 있다.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시원한 개방감이 방문객을 반긴다. 천장 상부에는 거울을 설치해 목조 구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깊이감을 주고, 내부는 전통 한옥의 미감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 웅장하면서도 아늑하다. 하지만 이 공간의 미학적 정점은 단연 실내 한가운데를 묵묵히 지키고 선 석등(石燈)이다. 박물관 야외 뜰에 있던 투박한 석등 하나를 도서관 내부로 옮겨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통유리창 너머 푸른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선 석등은 마치 천년의 시간을 잇는 문지기처럼 공간에 묵직한 깊이를 더한다. 석등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자 신라의 역사를 담는 도서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석등을 중심으로 벽면마다 낸 커다란 통창들은 바깥의 자연 풍광을 한 폭의 액자처럼 실내로 끌어들인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과 그림자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인테리어다. 이미 SNS상에서는 사진 명소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공간 구성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벽면을 책장으로 채운 세미나실, 큐레이터와 사서가 제안하는 북큐레이션, 그리고 자유롭게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개가열람실이 갤러리처럼 이어진다. 덕분에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위화감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이곳의 큰 파격은 자유로움에 있다. 전문 연구자를 위한 공간도 갖췄지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단연 소파다. 편안하게 기대어 책을 볼 수 있는, 이른바 ‘눕독’공간이다. 카페처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허용된다. 긴장하며 관람했던 박물관에서의 피로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이것이 경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이유다.
공간만 근사한 것이 아니다. 신라 역사·문화 전문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책의 내용도 알차다. 총 1만여권에 달하는 장서는 박물관학, 신라 불교, 문화유산, 미술, 고고학 등 전문 분야를 망라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전체 장서의 65%에 달하는 전시 도록 컬렉션이다. 박물관 측이 소장한 국내외 희귀 도록들은 일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구하기 힘든 보물들이다.
전시를 보고 난 후 도록을 읽는 맛은 각별하다. 금관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을 전시장에서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서 도록을 펼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감상할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한 유물의 감동을, 책장을 넘기며 다시 한번 세밀하게 확인하고 나만의 지식으로 만드는 희열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도서관이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깊이 있는 사색 공간인 까닭이다.
도서관은 유물 전시와 독서를 잇는 가교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큐레이터와 사서가 협업하여 꾸민 북 큐레이션 코너는 이곳만의 자랑이다. 현재 진행 중인 금관 특별전처럼, 전시를 관람한 뒤 도서관에 들르면 해당 주제와 관련된 깊이 있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실의 짧은 설명판에는 다 담지 못한 역사의 뒷이야기를, 책을 통해 채워갈 수 있는 것은 관람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밖에도 경주시립도서관과 연계한 북큐레이션 등 다채로운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또한 도서관은 경주 여행의 훌륭한 베이스캠프다.‘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다. 도서관 문을 나서면 야경 명소인 동궁과 월지가 도보 4분, 월정교와 황룡사지가 15분, 첨성대가 20분 거리에 있다. 젊음의 거리 황리단길도 30분이면 닿는다. 유적지를 직접 발로 누비며 느낀 감흥을 도서관으로 가져와 책을 통해 정리하거나 반대로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지도 삼아 현장으로 나가는 여행의 출발점으로 손색이 없다. 비록 책을 밖으로 빌려 갈 수는 없지만 가족 단위 관람객부터 나 홀로 여행자까지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공간의 가장 큰 매력은 안식과 치유이다. 학습과 연구를 넘어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쉼터로서의 가치다. 창밖 대나무 숲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누워 책을 펼치면, 신라 천 년의 숨결이 코끝에 스며드는 듯하다. 화려한 금관의 잔상과 책갈피 속에 숨은 옛이야기들이 어우러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경주를 만나게 된다.
이번 겨울, 박물관의 뜰을 거닐다 다리가 아파오면 주저 말고 월지관 뒤편 샛길로 향해보자. 따스한 햇살과 묵직한 석등 그리고 은은한 책 향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애란 칼럼니스트·문헌정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