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9장 / 광명세상을 꿈꾸는 백성들 (128)

2026-02-10     차형석 기자

“미안해. 그렇지만 조용히 떠나자. 내가 보부상을 통해서 알아본 데가 있어. 그곳에는 오백여 명은 살 수 있는 땅이 있는데 너무 깊은 산속이라서 관아의 눈길이 미치지 않아.”

“정말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래, 그곳에 가면 너희들과 내가 옛날처럼 ‘너나’ 하면서 살 수 있을 거야.”

“정말?”

“너희들과 내가 다시 예전과 같은 동무가 되어 살 수 있는 곳이야. 나는 그곳에 광명세상(光明世上)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빈부귀천 없이 함께 사는 마을로 만들 거야. 그곳에는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없어. 그냥 다 이웃이고 가족인 거지.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도와줄 거지?”

“알았어.”

“더 이상 울산땅에 미련 갖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떠나자. 같이 갈 마을 사람들을 알아보고, 떠날 때는 남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 각자 출발해서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는 걸로 하면 될 거야.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더 이상 설득하지 마. 당장 오늘부터 시작해서 모레는 떠나는 걸로 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이런 건 오래 끌면 문제가 생겨. 그냥 속전속결로 해야 해. 너희들도 서둘러.”



­보부상 서신 15호­



1598년 12월10일, 조정에서 포고령을 발표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임진란 이후 면천되거나 관직을 제수 받은 천민은 그 신분을 천민으로 되돌리고 관직은 회수한다. 양반이 아닌 자의 과거응시를 금한다.’

이 포고령에 의해서 천민의 신분이었다가 양반이 된 자는 다시 천민이 되었으며, 왜적과의 싸움에서 공이 있다고 제수 받았던 관직도 박탈당했다. 또한 양민들의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하여 양반이 아닌 자는 과거를 볼 수 없게 하였다.

주왕산으로 이주를 서두르던 천동도 이 포고령을 보았다. 토지를 억울하게 빼앗겨 이미 마음속으로 울분과 절망이 쌓인 상태에서 받은 충격이라서 잠시 동안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는 어른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줌의 미련도 기대도 다 버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된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