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명절, 전통주 한 잔에 담긴 손길과 시간의 깊이
이번 설에 고향에 갔더니 수년 전 공직에서 퇴임한 동생이, 모 대학교 농민사관학교에서 식초와 전통주 양조법을 배우고 손수 만들었다는 술을 맛보여 주었다. 첫 작품이라는데 꽤나 깊은 맛이 났다.
문득 어린 시절, 할머니가 안방 아랫목에서 술을 발효시키던 일이 떠올랐다. 호기심에 이불자락을 들치면 단지 속에서 뽀글뽀글 익어가던 막걸리의 향기가 천장 아래 달아놓은 메주 뜨는 냄새와 함께 방안 가득 퍼졌다. 쌀이 귀한 일제강점기부터 통일벼를 대량 생산하던 1970년대까지, 집에서 만든 술이 ‘밀주’로 취급되어 당국의 검열을 받을 때도 은밀하게(?) 가양주(家釀酒)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술 도가(都家)’라 하여 면 단위마다 양조장이 한두 군데씩 성업했지만 이젠 추억의 장소로만 기억되는 게 안타깝다. 필자의 고향 마을 건너 주막거리에도 양조장이 하나 있었는데, 동네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직원이 자전거 뒤에 한 말들이 술통을 두 개씩 매달고 배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의 삶과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술을 다룬 옛글은 많이 있는데, 고려 시대 이규보가 지은 가전체 산문 <국선생전>과 임춘의 <국순전(麴醇傳)>을 보면 술(누룩)을 의인화하여 인간사를 풍자하고 있다. 술은 적절히 마시면 약주가 되지만, 잘못하면 패가망신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독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주류는 크게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뉜다. 포도주와 맥주, 막걸리는 발효주의 대표적인 예다. 포도에 들어 있는 당을 효모가 알코올로 바꾸면 와인이 되고, 맥주는 곡물을 싹 틔운 맥아의 즙에 독특한 풍미를 내게 하는 홉(hop)을 섞어 만든다. 더 나아가, 와인을 증류하면 브랜디가 되고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된다.
당을 함유한 모든 농산물은 술이 될 수 있다. 사과는 물론 마늘이나 꿀도 술의 원료가 된다. 이들이 발효하면 알코올 도수가 원래 당도의 반 정도로 변한다. 18브릭스의 포도가 숙성하면 약 9도의 와인이 되는데, 12도의 와인을 생산하려면 먼저 설탕을 첨가하여 당도를 24브릭스로 높여야 한다.
우리의 막걸리는 누룩이라는 한 단계 과정이 추가된다. 누룩은 밀이나 귀리 등 곡류를 분쇄하여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살아있는 미생물 창고이다. 밥에 누룩을 섞어 발효하면 탁주가 되는데 그 원액에서 맑게 뜬 부분이 청주이다. 이를 다시 증류하면 전통 소주(燒酒)가 된다. 안동지방에서 보듯이 전통주를 빚을 때 ‘소줏고리’에서 똑똑 떨어지는 술 방울은 장인의 정성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희석식(稀釋式) 소주는 연속 증류로 고순도 주정(酒精)을 만들고 거기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20도 내외의 도수로 낮춘 술이다.
이처럼 우리 술의 특징은 ‘빚는 과정’에 있다. 와인은 과일이 함유한 자연적인 당을 발효시킨 것이지만, 막걸리는 누룩을 첨가함으로써 발효를 촉진하게 된다. 누룩은 쌀의 전분을 당으로 분해하고, 다시 그 당을 알코올로 변하게 하는 요술쟁이다. 이는 단순히 술의 재료를 넘어 전통주의 완성을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단양주에서 이양주, 삼양주(三釀酒)로 이어지는 양조법은 밑술에 새로 찐 고두밥을 다시 섞어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한 번 빚은 단양주는 가볍고 청량한 막걸리가 되고, 두 번, 세 번 빚을수록 향이 깊어지고 도수가 높아진다. 이는 삶과도 닮았다. 하루하루 날들이 쌓여 내공이 되고, 경험이 거듭될수록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숙성되는 것과 같다.
울산에도 단양주와 이양주를 생산하는 회사가 있지만, 필자의 고향 읍에는 낙동강 마지막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이 있고 매년 나루터축제가 열린다. 이 행사에는 막걸리를 시음하면서 주모 체험, 보부상 체험 등을 통해 전통과 문화, 사람 간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는 코너가 있다. 전통주를 소중히 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힘이다.
명절에 가족, 형제들과 둘러앉아 전통주를 마시는 것은 술에 담긴 한 가문의 가풍과 품격을 공유하는 일이다. 음복(飮福)으로 조상을 생각하며 절제와 풍류를 음미하는 시간이다. 이는 도자기를 빚듯 정성을 다해 누룩을 섞던 장인의 건강한 손길과 기다림의 미덕을 체험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전통주 속에는 알코올뿐만이 아니라 숙성된 삶과 우리의 문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권영해 시인·울산예총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