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 전란사(19)]가짜 왜구, 가왜(假倭)
1.
가왜(假倭)는 왜구의 침입이 많아지면서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왜구로 가장해 민간을 약탈하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말에 수탈과 압제의 대상이었던 계층 가운데에 왜구의 침입을 계기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왜구를 자칭하는 집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양수척(楊水尺)·화척(禾尺)·재인(才人) 등 천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천민 계층들이 지배층의 토지 탈점과 가혹한 수탈에 대해 조정에 반발한 것이다. 이들이 가왜로 나선 데는 정치적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 컸다. 왜구의 잦은 출몰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문란해지자 왜구를 가장해 도적 행각을 벌인 것이다.
가왜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화척들이 무리 지어서 모여 거짓 왜적으로 칭하고 영해군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관청과 민가를 약탈하니 판밀직 임성미, 동지 안소, 밀직부사 황보림, 전밀직부사 강서 등을 보내어 추격해 잡았다. 임성미 등이 포로로 됐던 남녀 50여 명과 말 200여 필을 바쳤다. (<고려사> 권 134, 신우 8년 4월)
② 교주·강릉도 화척·재인 등이 왜적으로 가장해 평창·원주·영주·순흥·횡천 등지를 약탈했다. 원수 김립견과 체찰사 최공철이 50여 인을 잡아 죽이고 처자를 주군에 나누어 두었다. (<고려사> 권 135, 신우 9년 6월)
③ 화척과 재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 항산(恒産)이 없으므로 항심(恒心)이 없어 산골짜기에 모여서 왜적으로 가장하고 있는데, 그 위세가 대단합니다. 빨리 대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高麗史> 권 118, 열전 31 조준, 우왕 14년 8월)
가왜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경우로 한정할 때 위의 기록이 전부이다. 물론 ②의 경우 화척이 가왜 활동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① 기록의 연장선에 있으므로 화척들이 가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나오는 기록이다. 위의 ①은 화척이 직접 가왜로서 집단화해 관아와 민가를 약탈해 피해를 많이 주고 있음을 알려주고, ②는 포로로 잡은 화척들의 처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왜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주모자만 처벌할 뿐 나머지 대다수는 석방해 일반 백성과 같이 역을 주고 살게 하는 온건 정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적으로 간주해 직접 토벌에 나서 처와 자식을 제외한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있다. 이것은 처음 가왜의 기록이 나타나는 우왕 8년 4월에는 가왜가 그리 극성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③은 우왕 14년대의 기록으로 재인과 화척이 가왜로서 활동할 것을 염려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개혁 세력의 핵심 인물의 하나인 조준이 전제 개혁의 일환으로 올린 글이지만, 그가 이처럼 재인과 화척 집단이 가왜로서의 활동을 염려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곧 당시는 특수 집단인 재인이나 화척이 직접 활동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가왜로 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그들의 유랑을 금지하고 땅을 주어 토지에 귀속시키려 한 것이다.
2.
재인이나 화척이 가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재인·달달이라 칭해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므로 국가에서 제민하는데 고르지 못해 민망합니다. 백정이라고 칭해 옛 이름을 변경하고 군오에 소속하도록 해 벼슬길을 열어주었으나 지금 오래된 자는 500여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디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그동안 내려온 풍속이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모여 살면서 자기들끼리 혼인을 하는데, 혹은 소를 잡고, 동냥질하며, 도둑질도 합니다. 또 고려 때에 거란이 내침하니 가장 앞서 향도했습니다. 또 가왜 노릇을 하면서 처음에는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까지 만연해 장수를 보내 토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크고 작은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이 무리입니다.’ (<세조실록> 세조 2년 3월 정유)
위 기록은 고종대에 양수척들이 처음에는 국가로부터 직역이 없었으나 기생 자운선에게 귀속됨으로써 이동의 자유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오르고, 또한 공납을 심하게 내게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거란족이 침입하자 항복하고, 그들의 길 안내자가 됐으므로 거란병이 고려의 모든 주요 지형을 알았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종전에 없었던 직역의 부담으로 인해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징병안은 더욱 강화돼 다음 해인 우왕 3년에는 왜구가 종식될 때까지 아예 무예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양반과 백성을 포함해 성년 남자의 화척과 재인 모두를 징집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에 의해 처벌받게 했다. (<高麗史> 권 81, 지 35 병 1 병제, 신우 3년 12월)
경작지도 없고 국가에 대한 부역도 가해지지 않았던 화척, 재인 등에 대해 집단의 성년 남자가 군인으로 징집된다고 하는 것은 집단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항해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길이 바로 가왜로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민 집단으로 신분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화척, 재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가왜로 대두됐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들에게서 민족이나 국가라는 의식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또한 지배층에 항거하기 위해 가왜로서 활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세조대의 집현전 대제학 양성지는 상소에서 화척, 재인 등의 유래와 그들을 토벌하게 된 이유를 적고 있다(<世祖實錄> 세조 2년 3월 정유). 이에 의하면 화척과 재인은 근원이 오래되고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거란의 향도가 되기도 하고 가왜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강원도에서만 활동했으나 후에 경상도까지 내려와 할 수 없이 토벌했다는 것이다. 곧 이들이 향도와 가왜로 변하게 된 이유를 그들만의 습속이기 때문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후대의 기록으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사하는 점은 적지 않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