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동천학사와 남도학숙, 그 인연과 우연

전남 인재양성의 요람 재경 남도학숙
1980년 문닫은 울산 동천학사와 대비
울산도 재경 향토학사 설립 힘모아야

2020-07-19     경상일보

재경울산향우회의 관심사 앞 순위에는 향토학사 건립문제가 있다. 따라서 호남인맥의 산실로 알려진 남도학숙을 살피던 중에 낯익은 함자인 김창식 선생을 만나면서 필자의 기억은 1975년 학창시절 친구 아버님으로 그분을 만났던 때로 되돌아 가 본다.

그 친구와는 동아리에서 만나 때때로 낭만의 이름으로 술자리를 가졌는데 통금에 쫓겨 그의 집으로 간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반드시 5시에 일어나 6시에는 의관을 갖춰 춘부장과 함께 식사해야 한다는 어색함과 불편함은 있었지만 가끔 신세를 졌고, 방학 때는 보름가량 기거하기도 하였다. 울산에서 고교졸업 후 서울로 진학한 필자는 해석 정해영 선생께서 설립하신 동천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친구 아버님은 당시 총무처 국장이셨는데, 전남 강진에서 상경하여 초급공무원으로 출발, 야간대학에서 주경야독으로 최고령 행정고시에 이어 사법시험까지 통과하신 입지전적인 분이셨다. 아침식탁에서 늘 단정한 정장차림이 인상적이었으며 야단을 치실 때나 조언을 주실 때에도 한결 같았던 조용한 어투를 기억한다. 군입대가 엇갈렸던 그 친구와는 졸업 후 진출한 분야도 지역도 달라 소원해졌고 춘부장께서는 총무처 차관을 거쳐 대통령정무수석, 전남도지사, 평통 사무총장, 교통부장관 등으로 관직이 바뀌면 언론을 통해 알게 되는 정도까지 무심한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분께서 공직은퇴 후, 남도학숙의 초반 6년간을 최장수 원장으로 기반을 닦으셨고 자랑스런 호남인상까지 수상하셨다는 기록을 접하면서 인연과 우연의 어느 지점을 더듬어 보게 된 것이다. 45년 전 그 분께 자랑하였던 동천학사는 1955년 설립되어 울산 지역인재를 키운 산실로 자리 잡았고, 500여명의 선배들이 정-관계와 재계에 두루 진출하여 울산발전의 초석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1980년에 문을 닫았다. 필자는 동천학사의 영원한 막내로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는 젊은 날의 소중한 공간으로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한편 남도학숙은 한 지역신문사가 주도한 재경학사를 위한 전남도민들의 모금운동이 시발점이었지만 1992년 호남인들이 마주했던 좌절감을 ‘인재육성운동’으로 응집시키면서 마무리 되었다. 1994년 서울 동작구에 850명 규모로 개관하여 25년간 남도인재의 요람으로 고향에 화답하였고, 더욱 상승된 지역주민의 지지에 힘입어 2018년 서울 은평구에 600명 규모의 제2관까지 열었다. 이미 배출된 1만3000여명이 대한민국 전역, 각계각층에서 활동 중이며, 25년 역사의 동천학사가 배출한 전체 인원과 비슷한 수의 졸업생이 남도학숙에서는 해마다 사회로 진출하게 된다. 지역별 인구비율로 신입원생을 배정하고 남녀, 예체능, 장애학생, 대학원생까지 고루 할당하는 폭넓은 관리와 다양한 장학금의 혜택도 있다. 방학 중에도 부분 개방하여 학원 수강 등의 편의를 제공하고 해외연수까지 지원한다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더구나 향토 일간지인 광주일보, 무등일보, 전남일보 수백부가 매일 새벽 학숙으로 배달되어 1500여 원생들이 고향소식 읽기로 하루를 연다고 하는 그 세심함까지 함께.

동천학사 시절, 졸업한 선배들이 돼지고기 몇 근 끊어 오는 주말은 후배들의 신나는 회식이 되고 사회생활의 경험담이 보너스인 사치를 누렸다는 자랑을 한 것이 기억난다. 그 소박한 자랑은 남도학숙에서는 유명 출향인사들이 원생들의 멘토가 되어 정기적인 강연과 개별면담의 시스템으로 진화되었다고 억지 줄긋기라도 하고 싶은 것은 왜일까? 하루 빨리 울산도 동천학사의 맥을 이어 지역인재 육성에 민관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필연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 향토학사가 없는 지자체중 대구와 경북은 함께 준비 중이라고 하니, 울산광역시만 남았다. 하루빨리 제2의 해석선생과 울산의 김창식선생을 고대하는 이유이다.

박정환 재경울산향우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