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세종대왕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2020-07-23     최창환

우리사회에서 한글이 과연 품격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있는가. 울산시에서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송철호 울산시장의 공약사업인 울산열린시민대학은 최근 간판을 교체했다. ‘울산이노베이션스쿨’이다. 이노베이션은 혁신이라는, 스쿨은 학교라는 뜻이다. 외래어로 좀 더 수준 높아 보이길 기대 했나 보다. 이 뿐만 아니다. 울산시 정책 뿌리깊이 외래어가 자리잡고 있다. 울산의 정체성을 담아낸 선전 문구도 ‘더 라이징 시티’이다. 파워시티, 휴먼시티, 프레스티지시티, 콤팩트시티, 메가시티 등이 울산시가 추구 도시모델도 모두 외래어를 썼다. 태화강 국가정원 1주년 기념해 발표한 청사진을 보면 정도가 지나치다. 백리대숲 스카이워크, 태화강 가든 브릿지, 스마트가든볼, 버드 아이즈 가든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세븐 브릿지, 나인 브릿지, 스마트 모빌리티, 어뮤즈먼트 공간, 게놈 오픈 랩, AI 이노베이션 파크, ICT 르네상스, 바이오데이터 팜, 유틸리티성 자원공유지원센터, 글로벌 에너지 비즈니스센터 등 정체성도 모호한 외래어를 경쟁적으로 쓰고 있다. 도무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도 즐비하다.

외래어를 써야 명품 정책이고, 우리말을 쓰면 질이 떨어지는 정책이란 말인가. 행정기관이 왜곡된 외국어 사용을 자성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되레 혼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서 세종대왕이 벌떡 일어날 일이다.

행정기관이 앞장서 국어를 경시하고 파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다. 외래어로 범벅이 된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글은 뛰어난 조직, 구조, 원리 등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과학성, 독창성, 합리성 등을 기준으로 세계 문자들의 순위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글이다. 이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우리말과 글을 우리 스스로가 푸대접하고 있다.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고 우리말과 글의 설자리가 좁아지면 안 된다. 말과 글은 한 민족을 지탱해 주는 얼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최창환 사회부 기자 cchoi@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