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9)]위기에 빠진 이성

불안에 떠는 이웃들의 어려움 외면하고
자신의 종교적 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뜻인가 묻고파

2020-09-01     경상일보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고 사회 현상을 정리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성의 합리적 능력 덕분에 지구상의 어느 동물도 이루지 못한 과학과 문명을 창조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나 인간의 권리와 같은 개념도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이성의 합리성이 창조한 가치다. 앞으로도 인간 앞에 놓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이성의 합리성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믿어 왔던 이성의 합리성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종교적 신앙을 앞세워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언설(言說)을 공공연히 외치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나 죽음과 같은 근원적인 가치도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하는 가벼운 대상으로 여긴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럼없이 외친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딴 세상 사람들 같다. 기도로 바이러스를 물리친다며 신도들을 교회로 거리집회로 모으는 이들에게서 이성의 합리성을 찾아보기는 이미 힘들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우주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천문학을 배우고 인간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는 것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하찮은 일상이 신의 계시나 종교적 의미로 가득 찬 시간으로 거듭나기를 염원하면서 산사나 교회를 찾는다. 개인이 겪는 아픔도 우연한 육체나 정신의 불균형이 아니라 신의 계획 속에 예정된 시련이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시련이 절대자의 의지에 의한 특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피하기보다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보람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를 지향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상과 기도로 조용히 나를 지켜보는 신에게서 종교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믿음은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 낸다. 매일 매일 감동과 은총을 내려 주는 신을 현실에서 구하는 것이다. 나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 현실적인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과 소통하고 신의 뜻을 해석해 주는 사람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신을 찬양하는 길이다. 목사의 비이성적인 한마디에 생명을 무릅쓰는 일부 교회 신도들의 행동을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또 그들에게는 이러한 행동을 정당화할 현실적인 박해자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신과 나 사이를 가르는 현실적인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만들어서라도 존재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가상의 적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북한이 교회에 바이러스 테러를 하고 정부가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서 거짓 확진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적이 확실히 정해지면 행동하기는 쉽다. 박해에 저항하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이성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저 신앙을 강화하는 도구일 뿐이다.

종교의 목적이 세속에서의 힘을 강화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이러스와 싸워 이기는 길은 기도 밖에 없다고 설득하여 신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질병 감염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을 종교탄압이라고 억지 시련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합리적 판단이다. 불안에 떠는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뜻일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이성의 힘을 가진 것도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신에 대한 믿음을 요란한 말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한 수녀 마더 데레사를 성인으로 칭송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