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49)]르네상스가 시작되다
이탈리아(7)
중세 문화·예술 발원지 피렌체
유력가문들 공공건축에도 경쟁
화려한 랜드마크 성당 짓기 시작
공사기간만 한 세기가 넘게 걸려
마무리 공사 위한 공모전 개최
르네상스식 돔 건축 기틀 마련
중세시절 피렌체는 꽃이 만발했던 모양이다. ‘꽃’이라는 의미를 갖는 피렌체가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은 13세기 정도로 알려진다. 모직산업을 기반으로 상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성장했다. 축적된 경제력은 새로운 욕구를 불러내고, 이를 충족시킬 예술가, 과학자, 문학가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중세시대에는 감히 시도조차 못했던 새로운 예술과 건축과 문학들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고, 피렌체는 그 발원지가 됐다.
‘인본주의의 부활’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가 어떻게 피렌체에서 시작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신흥 상공업자들이 사회주도층을 이루었던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직종별 협의회 아르테(arte)를 조직했고, 공화체제를 이끄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교회가 주도했던 신권주의 중세시대에 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이념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고, 문예 분야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던 것이다.
부유한 상공업자들과 정치권력을 추구했던 유력가문들은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도시경관을 선도할 공공건축에도 열을 올리게 된다. 특히 메디치가문은 궁과 관청, 도서관, 미술관 등 많은 건축프로젝트를 후원했다. 건축가들은 도시의 성장에 걸맞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해야 했다. 그들은 인본주의 정신이 넘쳤던 그리스·로마 건축을 되돌아보는 데서 출발했다.
피렌체의 랜드마크가 될 건축은 피렌체 두오모 성당(Santa Maria del Fiore)의 설계에서 시작된다. 마침 이웃 시에나에서 세계 최대의 성당을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토스카나에서 시에나와 주도권 경쟁을 벌이던 피렌체가 두고 볼 리는 만무했다. 시에나 두오모보다 더 크고 웅장한 성당을 짓기로 하고 1296년 공사를 시작했다. 팔라쪼 벡키오가 설계한 이 성당은 크기도 세계 최대급이었지만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으로 꾸민 폴리크롬(polychrome) 기법으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 성당의 종탑은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였던 조토(Giotto di Bondone·1267~1337)가 맡았다. 조토는 본당과 같이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을 이용하여 종탑을 설계했다. 기하학 무늬의 색조 대리석으로 꾸며진 이 종탑은 층별로 다른 디자인이 구사됐다. 근엄하게 무표정하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기만 한 중세의 성당 종탑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오브제로 변신한 것이다. 이는 피렌체의 도시 분위기를 선도할 기폭제였다.
1359년 종탑은 완성되었지만 성당은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었다. 문제는 대성당의 뚜껑인 큐폴라(cupola)를 얹는 일이었다. 당시의 기술로는 지름 44m의 거대한 큐폴라를 시공할 방법이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목재 틀을 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큐폴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목재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목재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서 작업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목재 틀을 해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418년 큐폴라를 세우기 위한 공모전이 열리게 된다. 당선작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9~1446) 안으로 결정됐다. 그는 로마 고전건축을 깊게 연구한 건축가였다. 그는 가로 세로 뼈대(rib)로 구성된 팔각 돔으로 구조체를 제안했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참고한 것이다. 돔의 두터운 내벽과 얇은 외벽 사이에 공간을 두어 큐폴라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도 창안했다. 반구형 돔으로는 하중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돔의 모양도 첨두아치(pointed arch)처럼 위로 더 뾰족하게 만들었다. 돔 하부에 드럼(드럼통 모양의 벽)을 두어 창문을 내었는데 이는 르네상스식 돔의 관례가 됐다. 1436년 드디어 피렌체를 대표하는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착공한지 140년 만이다.
광장에서 아르노 강으로 향하는 골목, 양쪽으로 열주가 우아하게 늘어선 이 건물이 우피치 미술관이다. 본래는 16세기에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집권하면서 집무실 겸 관공서로 지은 것이다. 우피치(Uffizi)라는 말도 영어로 오피스에 해당하는 이태리어다. 문화와 예술의 애호가였던 그는 이 건물 3층에 예술품을 수집,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건물을 지을 당시부터 미술관의 기능을 겸했던 셈이다. 물론 이 미술관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긴 ㄷ자형으로 구성된 미술관은 마주 선 두 건물 사이가 도시의 골목길이면서, 동시에 미술관의 마당이 된다. 분명 아르노 강으로 통하는 골목길이지만 중정을 둘러싸는 아트리움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내부공간을 이룬다. 1층에는 미끈하게 다듬어진 도리아식 기둥들로 회랑을 만들었고, 중간의 사각기둥 안에는 아치형 감실을 두어 조각품을 설치했다. 마치 미술관의 내부를 거니는 듯 즐거움을 준다. 그 단부에는 우아한 개선문 형태의 아치가 아르노강으로의 시선을 열어준다. 로마건축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형 공간의 정수라 하겠다.
강으로 나오면 베키오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각보처럼 다닥다닥 붙은 3층짜리 다리의 맨 윗층은 비밀통로로 사용했다. 코스모 1세가 강 건너 호화스런 피티 궁과 우피치 사이를 몰래 오가기 위해 만든 통로였다. 권력자가 자신의 동선을 은폐시키고 차별화하는 비밀통로를 만든 것이다.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도시를 만들어 시민과 공유하려 했던 선조들의 초심을 잃고, 그는 이미 시민과 괴리된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건축과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 그들은 이 도시에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고, 그 꽃은 그들의 몰락과 함께 시들고 말았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