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10)]트로트의 힘
암울한 미래 잊으려는 소극적 활동 아닌
강력·성숙 에너지 포함한 문화운동으로
마음 위로할 수준 높은 대중문화도 기대
살다보면 삶의 희로애락의 굽이굽이가 트로트 곡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삶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표현한 어느 시인의 통찰과 감성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가슴에 와 닫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젊어서는 클래식 음악의 격조를 강력히 주장하고 추구하던 사람도 세속의 힘든 일을 겪고 나면 트로트와 같이 우리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에서 위로를 찾는다. 특히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어긋난 사랑에 대한 회한을 한 순간이나마 위로할 곡조로는 트로트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마음 구석에 눌러 놓았던 이런 감성을 불러내어 풀어내기에 적절한 장소는 대개 적당한 알코올 기운과 어두운 조명이 배경으로 갖추어진 노래방 같은 곳이 제격이다. 하다못해 젓가락 장단이라도 눈치 보지 않고 맞출 수 있는 약간은 외진 곳이라야 한다. 그만큼 정서에 담긴 정한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는 트로트 열풍은 삶의 애환을 위로하는 개인적인 의례 수준을 넘어 전 국민이 참여하는 한 마당 신명난 굿판이자 문화조류가 되어버렸다. 우리민족에게는 원래 트로트 가락에 대한 유전자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정도다.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면서 어른들의 한을 노래 가락으로 일찍 배워버린 트로트 신동으로부터 유럽 음악의 본고장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배운 유학파까지 트로트 곡조에 담긴 한을 새로운 감성으로 구성지게 꺾어내는 가수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트로트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슴 한 구석에 간직되어 있는 감성을 가장 화려하고 강한 모습으로 불러낼 줄 아는 마술사들이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음악적 취향을 불문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환호한다. 얼마 전 80이 넘은 여자 배우가 임영웅의 노래 가락에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았다. 음악에는 거의 문외한인 아내도 트로트에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트로트의 가사 수준을 지적했다가 대책 없는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쯤 되면 음악의 수준을 이야기하고 예술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려워지고 지인들과의 심리적 거리마저 소원해 지는 시대에 쉽게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예술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회한이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이 주요 테마가 되는 가벼운 대중 예술이라는 것에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시대적인 아픔도 사람들이 트로트에 열광하는 데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다.
인간의 정신은 항상 미래를 지향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를 보낸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확실하거나 가능성이 보이면 그것을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염려한다. 미래를 위해서 인간이 현재 할 수 있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가 암울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때에는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나간 시간이지만 확실한 과거를 떠올리며 재구성하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의 정신은 예측할 수 없거나 정리되지 않는 대상을 머리 속에 오래 두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나간 일이라도 확실한 것을 떠올리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것도 아름다운 가락과 애절한 목소리로 재현할 수 있으면 더욱 강력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트로트 열풍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미래를 잊어버리고 과거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는 소극적인 문화 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강력하고 성숙한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 문화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앞으로 더 어려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도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지켜낼 수 있는 좀 더 수준 높은 대중문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