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언어장애인 삼룡이

벙어리·애꾸눈 등 순 우리말들
‘○○장애인’들로 다 바꿨지만
교양 앞세운 낱말 화풀이에 불과

2020-11-08     경상일보

학창시절 읽었던 나도향의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언어장애인 삼룡이>라는 제목으로 고쳐보았다. 최근 어느 기자가 ‘애꾸눈’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고소당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생각해 본 것이다. 고소인은 ‘애꾸눈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명백한 경멸, 비하, 조롱이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소설 속 삼룡이는 ‘마음이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해서 오생원의 사랑을 받고 있다’로 묘사된다. 그런데 ‘벙어리’라는 순 우리말은 ‘낮잡아 이르는 말’로 규정되어 속세를 떠나 국어사전 속에 머물러 있다. ‘언어장애인’으로 바꾸어 부른다고 높임말이 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장애’라는 말이 못마땅하다. ‘장애’를 국어사전에는 ‘신체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 장애’나 ‘분노조절 장애’ ‘선택 장애’처럼 특정 단어 뒤에 붙어 부족함이나 열등함의 부정적 의미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어서 그렇다.

앉은뱅이, 절름발이, 외눈박이, 곱추, 외팔이, 애꾸눈 등 순 우리말들은 일본식 조어같은 ‘무슨 장애인’들로 다 바뀌었다. ‘째보선창’은 행정서류와 지도에는 ‘죽성포’로 바뀌었어도 도담스런 단어 째보는 군산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와 조정래의 ‘아리랑’의 터주는 ‘째보선창’이다. 서울에도 85년의 노포 ‘곰보추탕’은 서울식 추탕의 대명사 반열에 당당하게 들어 있다. 비하의 뉘앙스가 있다면 소중한 먹거리에도 ‘곰보배추’ ‘째보자두’등의 이름을 붙였겠는가.

어떤 이는 2년여 일본에 살다와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지만 필자는 4년 정도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영어 몇 단어 인용함을 양해 구한다. 영어는 ‘한눈 가진 사람(one eyed man)’이라고 애꾸눈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더구나 ‘편향된 시각’을 ‘one eyed view’ 라고도 쓴다. 신체의 장애를 어떻게 표현하든 말하는 이에게서 장애를 넘어서는 야릇한 감각이 내포되어 있다면 비하나 조롱이 되는 것이지 ‘육체적 개성을 객관적으로 적시하는 합리적 호칭’을 문책할 일은 아니지 싶다. 육갑한다는 욕이 있다. 아니 한국에서만 욕이 된다. 불구라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와 연결짓지 않는 선진사회에서는 육갑을 짚을 줄 아는 능력만을 평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이, 절름발이 어서 오게나 (Hey, cripple guy! come on in)”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저 살색이나 머리카락 색이 다른 정도로 여길 뿐이고, 정작 당사자도 다리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눈먼 돈 (blind money), ‘돈에 눈이 먼(money-blind)’은 물론 ‘궁색한 변명’에도 ‘lame excuse’ 라며 절름발이를 붙인다. 우리 언론들은 아예 번역하지 않고 레임덕(lame duck)은 그냥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사회적인 노력에 앞서 애꿎은 낱말에게 먼저 화풀이 한 것은 아닌가싶다. ‘귀머거리’를 차별하고 조롱해왔던 우리사회와 우리 자신을 차분히 반성하는 것이 우선이지 ‘청각장애인’으로만 바꾸어 부르는 것은 또 다른 위선은 아닐까.

교양과 배려를 앞세운 낱말 화풀이는 인종, 민족, 성차별적 편견 타파라는 명분으로 ‘살색’으로까지 이어진다. ‘살구색’으로만 칠하던 우리의 편견만 바꾸면 될 일이지 ‘살색’이란 단어까지 쓰지 말아야 할까. 검정색, 흰색, 살구색, 갈색처럼 다양한 ‘살색’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피부색’으로 바꾸어 부르면 교양어가 되는지 모르겠다. 미국 인디언들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던 11월이다. 정겨운 단어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오랜만에 앉아보는 ‘앉은뱅이 책상’은 어떻게 바꾸어 불러야 할지 고민해 볼 일이다.

박정환 재경울산향우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