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울산 동해 바이킹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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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멜솜(Henrik Govenius Melsom, 1870~1944) 선장이라 부르자. 노르웨이 베스트폴(Vestfold) 출신 멜솜은 1897년 러시아 케이제를링 백작과 함께 극동아시아로 왔다. 처음엔 블라디보스톡에서 장전항과 장생포를 오가며 포수로서 귀신고래를 잡았다. 러일 전쟁 후에는 동양포경회사에 몸담고 나가사키와 장생포를 오고 갔다. 1911년 겨울에는 로이 채프만 앤드류스를 안내해 한국계 귀신고래를 세계에 알렸다. 그렇게 장생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12년 귀국해 스스로 포경회사를 경영했고 남극까지 진출하며 노르웨이 포경의 전설이 되었다. 장생포 포경은 처음 40년간은 멜솜을 위시한 노르웨이인들을 통해 유럽식 포경선과 포경기술을 도입한 러시아와 일본이 이끌었고, 우리는 해방 후에야 포경산업 독립을 해서 40년간 지속했다. 하지만 1982년 상업포경 모라토리엄이 채택되었고 어느새 40년이 다 되어간다.
울산은 1986년부터 상업포경을 멈춘 대신에 고래축제를 열고, 고래박물관을 짓고, 관경선을 띄우고, 고래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대에 맞춰 변모해 가야한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장생포에서 살아있는 돌고래 전시를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모양이다. 고래이야기는 야만적이면서 낭만적인 양면성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에 고래는 용과도 같은 신화였지만 사람이 잡을 수 있게 되자 반달곰 같은 자원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약 50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고래보호 활동이 조직화되자 지금은 진돗개처럼 인간의 친구로 대하며 보호해야 하는 특별한 생물이 되었다. 메탄가스를 내뿜는 가축을 적게 먹고 고래를 식용하는 것이 환경에도 좋다는 일설이 있기는 하지만, 식물성 플랑크톤을 증가시켜 탄소를 포집시키는 데는 고래를 보호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돌고래 전시공연을 계속할지 여부에 대해 법률적, 정책적 결론이 어떻게 나든 한반도 연해 포경을 둘러싼 역사 연구는 더 활발하게 전개되길 희망해 본다. 우리에겐 아직 반구대암각화가 있고 귀신고래회유해면이 있으며 태풍으로부터 어선들을 지켜와 준 장생포가 있다. 소설 모비딕은 동해까지 미국 이양선이 오가며 포경산업이 한창이던 1851년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모비딕은 석유가 에너지와 산업용 소재로 세상을 휩쓸고 1차 세계대전으로 포경업이 자연스레 종말을 구한 이후가 되어서야 미국 최고의 문학작품이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야만이 역사 너머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역사 자체를 관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멜솜의 장생포 포경활동 사진들을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는 차녀가 톤스버그 소재 슬롯츠피엘박물관(Slottsfjellsmuseet)에 기증했다고 한다. 2017년 일본의 우니 요시카즈(宇仁義和) 도쿄농업대학 교수가 이를 입수해 알려주고 있다. 물론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의 주체적 시각으로 자료를 추가로 발견해내고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먼 곳이지만 알고 보면 한반도와 인접한 러시아와 이웃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와 공통점이 있고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가야 한다. 노르웨이 에퀴노르 등이 부유식 해상풍력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고, 대곡천 암각화 발견 50주년을 맞아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 선정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이 적기일 수 있다. 사실 암각화를 남긴 선사시대 울산 바닷가 사람들도 바이킹(viking, 포구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야흐로 고래를 잡던 북해의 바이킹 후손들이 다시 울산 동해로 오고 있다. 오라, 동해로! 가자, 북해로! 울산에 바이킹 룬스톤(Rune-stone)을 세우고, 스칸디나비아 곳곳에 대곡천 암각화를 소개해 보면 어떨까?
김상육 울산시 환경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