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만시지탄(晩時之歎)의 역설(逆說)
父·아들·손자 함께하는 100세 시대에
가부장제 중심 윤리체계도 많이 변해
자식 배려해주는 마음이 효자 만들어
라면형제. 두 어린 형제의 화상사건에 마음시리다. 연거푸 아동학대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아이들 부모에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격분한다. 아동사건이나 가장폭력사건의 조사를 시작하면 부모는 온갖 항변을 한다. 가정 내의 일이고 정당한 징계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우긴다. 가장의 자치권이 있는가? 부모는 자식에게 징계권이 있는가? 학교는 부모의 징계권에 기대어 체벌을 할 수 있는가?
시민들의 합리적 의심이 잇따르자 국회는 민법 개정안을 내었다. 민법 제915조를 삭제하자는 것이다. 그 내용은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관계는 무엇일까. 한국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가부장제 중심의 윤리체계가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조류가 변했다. 프랜디(Frandy)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고 가슴팍에 아이를 안고 다니는 아버지도 늘어났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대하는 시대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입장이 추가된 것은 확실하다.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 부모가 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자신을 최적의 부모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자식도 부모도 역할연습의 기회 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삼강오륜도 재해석하여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자식은 친하여야 한다. 종래 이 덕목은 자식은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고 해석되어 왔다.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윤리. 아버지와 아이가 얼마나 다투었으면 서로 친하게 지내라 했겠는가. 모자유친(母子有親)이라는 말은 들은 바 없다. 모자간 다툼이 부자간보다 적었나 보다. 모자간에 관하여는 효(孝)를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대에는 모자의 다툼도 부자에 못지않은 듯하지만.
효(孝)라는 글자를 파자(破子)해보면 늙은이(老)가 자(子)에 업혀 가는 형국이다. 사람들은 이들 두고 부모가 자식에게 의존하는 도리를 설명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원리가 훌륭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이 공서양속이라 생각한다. 생각을 뒤집어 보면? 자식이 부모를 짊어지고 있는 형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여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위 덩뎌둥셩/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없애라. 사모곡(思母曲)의 일부이다. 단지 낳고 키워주었다고 자의 부양의무가 설명될까? 민법은 ‘친권자는 자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의무가 있다.(제913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부모의 보호 교양 의무는 분명하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호 교양이 부모의 권리일까? 법철학적 문제이다.
잘 키워진 자식은 시키지 않아도 부모의 은공을 안다. 부모의 봉양은 선량한 풍속이다. 하지만 반드시 잘 키운 아이만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잘 키운 것인가? 결론은 ‘모른다’이다. 교육학이라는 과목이 있고 수많은 교육논문이 있어도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과거에는 ‘가정에서 엄격히 키웠습니다’라는 말이 보호교양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부모와 자식은 수직 서열화 관계에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좀 바뀌었다. 부자가 수평적 교류하는 경우가 늘어간다. 자식이 교육의 객체에서 주체로 등장. 부모간 격의없이 경험을 공유하며 ‘저희가 낳은 자식이므로 의무를 다 하려고 애썼습니다.’하는 이도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를 봉양하려 입신양명하였더니 부모는 이미 만날 수 없네.’라는 뜻이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 90세 아버지, 60세 아들, 30세 손자가 함께 하는 사회. 역으로 부모는 자식을 기다리나 자식은 자기 일에 바쁘다. 아낌없이 자식을 자애(慈愛)하자. 효자(孝子)는 부모(父母)가 만든다. 전상귀 법무법인현재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