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문헌속 재미난 병영성 비사
최근 발간 향토사보 31집에
엄형섭 울산문헌연구소장
울산도호부사 역임 심원열의
문집‘학음산고’속 기문 번역
임란 당시 병영성 일화 소개
2020-12-22 홍영진 기자
울산향토사연구회가 발간한 <향토사보(鄕土史報)>(제31집)에는 엄형섭 울산문헌연구소장의 ‘울산 병영성 관련 기문 3편’ 원고가 실려있다. 원고는 <학음산고> 속 기문의 한자 원문과 이에 대한 한글 해석으로 △울산 좌병영 성첩 기문 △울산 좌병영 운주헌 기문 △침과정 기문 순으로 구성된다.
울산병영성은 조선 초기부터 왜구로부터의 침탈을 저지하는 방어적 성격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엄 소장의 원고(해석)에 따르면 임란 당시 병영성에서는 그같은 역사적 의미를 상쇄하는 사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임진년(1592) 당시 울산좌병영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왜구방어를 위해 동래로 갔었으나 왜군 세력에 겁을 먹고 곧바로 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때 성을 지키던 부장과 병마우후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각 역시 백마를 타고 북문으로 달아나 황방사(黃方寺)로 숨어들었다 한다. 300년 뒤 울산도호부사 심원열은 이 이야기를 듣고 성첩 기문을 통해 통탄의 심정을 남겼다. ‘동래로 쳐들어 온 왜구들이 울산에 이르러 이각이 달아나 방어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승승장구하여 조령을 넘고 한수를 건너니, 나라의 운명이 더욱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좌병영에 임금이 하사한 월(鉞·도끼)이 없는 까닭에 대해서도 ‘어떤 절도사가 충절을 잃고 달아나고서부터 조정에서 다시는 월을 하사하지 않았는데, 그가 곧 이각이라고 한다’는 군속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을 정도로 한탄했다.
병영성 서쪽에는 깨끗하고 조용해서 책 읽기에 그만인 ‘침과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심원열의 비통함이 얼마나 컸는지, 그는 정자 기문에서도 다시한번 그 날의 치욕을 되새기며 “왜가 울산 좌병영을 침범했을 때 절도사 이각이 백마를 타고 북문으로 달아났고 경상좌도 병영도 지키지 못했으니 3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긴다’고 할 정도였다.
한편 향토사보 제31집에는 이와함께 ‘홍주 스님과 소설 下山’(김석암), ‘장무공 박윤웅에 대한 고찰’(박원조), ‘울산에 존재했던 기호학파 난곡서원 자취를 찾아서’(박경자) 등 12편의 원고가 실렸다. 홍영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