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5)]마법 같은 동화, 프라하 성
체코①
1천년의 역사로 도시 이룬 프라하 성
카렐 4세 세운 성 비투스 성당이 중심
거대한 첨탑·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로마황제 위용과 프라하 황금기 상징
프라하 시내 경관 수놓은 빨간 지붕들
체코인들 자유 향한 열망 보여주는듯
보아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보헤미아(Boiohaemum), 그들을 일컫는 보헤미안(Bohemian)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수사할 때 종종 사용된다. 무수한 외세의 지배와 간섭 속에서도 자유를 위해 끝없이 투쟁했던 질곡의 역사가 체코인들의 기질로 축적된 것은 아닐까. 암울한 역사 속에 빛나는 투쟁의 서사처럼 보헤미아 들판에 피어난 화사한 들꽃, 프라하에 닿는다.
프라하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세기 초의 일이다. 카렐 4세(Karel IV; 1316~1378)는 체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손꼽힌다. 외교와 정치의 달인이었던 그는 보헤미아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부유럽 최초의 대학을 세워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치세동안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카렐대학, 카렐교, 카렐광장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라하의 오래된 역사유산들은 바로 그의 치세로 만들어진 것이다.
프라하 역시 강을 경계로 군주와 백성의 공간이 나뉜다. 강 건너 프라하 시를 굽어보고 있는 곳이 프라하 성이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 뒤에는 영광과 비운과 질곡의 역사가 그림자로 남아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축, 증축의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성은 궁전과 교회, 정원, 주거 등을 지속적으로 증축하면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어 갔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중정으로 구획된 여러 영역 안에서 다양한 건축양식과 만난다. 그 건축양식 뒤에는 영욕의 역사가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성의 토대는 이곳에 터를 잡아 성채를 쌓았던 9세기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며,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소박했던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습을 증언한다. 고딕양식의 건물들은 프라하가 황금기를 누리던 14세기 카렐시대의 영광을 재현한다.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와 18세기의 바로크 건축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반영하기도 한다.
다중적으로 겹겹이 둘러싼 영역들을 거쳐 안쪽으로 들어 갈수록 보다 오래된 건축유산과 만나게 된다. 밖에서 보자면 오래된 보물들을 새로운 포장지로 겹겹이 포장한 격이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의 중세 성채에서 성의 중심부에는 대부분 교회를 세우곤 했다. 그것은 기독교 왕국으로서의 상징이며,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성안의 교회는 왕실의 예배소이기도 하고, 왕족의 묘소, 왕실의 보물창고, 또는 대관식 같은 국가행사의 장이 되곤 했다. 신의 은총과 가호를 받는 왕실을 과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프라하 성의 중심은 단연코 성 비투스 성당이다. 원경으로나 근경으로나 프라하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임에 분명하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웅장한 첨탑의 강한 수직성, 바로 고딕건축의 위엄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궁전 건물들은 성당을 포장해 주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 걸작을 만든 이는 바로 카렐 4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프라하의 황금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로마황제의 위용에 걸맞은 웅대한 교회를 새로 짓고 싶어 했을 것이다.
대성당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건물의 파사드가 시야를 가로 막는다. 고개를 목 뒤로 한껏 젖혀서야 정면을 구성하고 있는 양옆에 82m짜리 첨탑 꼭대기가 나타난다. 사실은 건물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성당건물 앞에 여유 공간이 없기 때문에 더 높게 보인다. 보통 높은 성당 앞에는 그에 비례하는 너른 광장이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성의 증축 과정에서 마당이 축소된 것은 아닐까.
남측에 있는 102m짜리 첨탑은 거대하다 못해 위압적인 모습이다. 탑 하부에 왕이 대관식 때 성당 안으로 입장하던 황금 문을 두었다. 그 거대함은 섬세한 장식적 세부 때문에 화려함으로 바뀐다. 입구 상부를 장식하는 금색 모자이크와 트레이서리(장식창틀)는 고딕의 위압적 스케일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 요소가 된다.
내부 또한 고딕성당 답지 않은 밝고 경쾌한 상승감을 갖는다. 두꺼운 기둥을 얇은 세로 줄로 분절하여 수직성을 강화시키며, 2층의 넓은 창호를 통해 풍만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온다. 그 빛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상들을 투과하면서 신비롭게 산란한다. 체코 민족주의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는 샤갈과 같은 현란한 색상으로 바츨라프 성인과 함께 의인화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표현했다.
프라하 성 안에는 백성들의 거주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성의 후면에 배치된 ‘황금소로’는 원래 병사들의 막사로 16세기에 건설된 것이다. 나중에 연금술사들이 들어와 금박세공 거리가 되면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지배자의 권위공간과 서민들의 생활공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중세라는 시대경관을 통합적으로 연출한다. 장난감만큼이나 앙증스러운 집과 거리, 마술지팡이나 ‘날아다니는 빗자루’를 팔 것 같은 가게, 그것은 왕궁과 더불어 신비로운 마법 동화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성곽을 돌다가 전망대에서 프라하의 시내를 한눈에 담는다. 동화속의 삽화처럼 빨간 지붕의 집들이 강변을 꽃밭으로 물들였다. 빨간 지붕은 프라하를 특징짓는 핵심적 요소다. 파스텔 톤의 연노랑 벽체와 어울리며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수놓는다.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이 시대와 기능, 규모와 형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시경관의 맥락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지붕색상과 재료를 통일적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라하를 보헤미아 들판에 가득한 붉은 꽃밭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