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199)]곡우, 그 호우시절

2021-04-19     이재명 기자

때맞춰 내리는 비를 호우(好雨)라고 한다. 두보는 안사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 청두에 초당을 짓고 시를 지었다. 이름하여 ‘춘야희우(春夜喜雨)’. 이 시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호우시절’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비는 만물을 풍성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곡우((穀雨)에 내리는 비는 은총이다. 곡우(穀雨)는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하는 날로 정의돼 있다. 穀자는 禾(벼)자와 殼(껍질)자가 결합한 것으로, 비가 내려야 벼껍질 속에서 싹이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예로부터 곡우의 가장 중요한 일이 볍씨를 담그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벼는 씨를 뿌리고 거두기까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산다. 볍씨가 한 톨의 쌀이 되기까지 88번의 손이 간다고 해서 쌀 미(米)를 파자(破字)해 ‘八八’자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농부는 한 포기의 벼를 키우기 위해 볍씨를 고르고, 모를 내고, 오뉴월 뙤약볕에 김을 매고, 추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추수를 하고 난 뒤에는 탈곡, 도정까지 마쳐야 한 줌의 쌀을 얻을 수 있었다.

쌀 미(米)는 상형문자로, 벼 이삭의 모양을 본 따 만든 글자이다. 그렇지만 ‘88번의 손길’이 훨씬 다가 오는 것은 왜일까. 옛말에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곡물과 농부가 이심전심 소통을 하는 계절임에 틀림없다.

곡우 무렵에는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충남의 격열비열도까지 올라온다. 이때 잡힌 조기를 곡우사리라고 한다. 아직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어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도 모여든다.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정약전은 조기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큰 놈은 한자 남짓하다. 모양은 민어를 닮았고 몸은 작으며…알은 젓을 담는 데 좋다. 홍양(전남 고흥) 바깥 섬에서는 춘분 뒤에 그물로 잡는다. 그리고 해주 앞바다에서는 소만이 지나서 그물로 잡는다. 흑산 바다에서는 음력 5~7월이 되면 낚시에 걸리기 시작한다.”

조기는 산란할 때 소리 내어 우는 습성이 있는데, 그 시점이 곡우를 전후한 시기이다. 조기가 울면 하동과 보성의 녹차밭에서는 ‘첫물차’라는 우전(雨前)을 맛보려는 차 마니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러워진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