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아이는 어른의 품에서 자란다

2021-04-27     경상일보

아마 내가 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칠 남매의 막내인 나는 그때까지 엄마 젖을 놀잇감처럼 빨고 지냈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느라 엄마는 너무 바빠 막내인 나를 보살피는 게 넉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엄마의 사랑은 늘 애타는 목마름이었다. 그러니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빨며 그 허기를 채우려 했겠지.

하루는 엄마를 따라 돌땅댁에 갔었다. 두 분은 마루에 앉아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엄마 젖을 만지작거리며 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깨물었던 것 같다. 너무 아팠던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내 등을 세게 내리쳤다.

“이놈의 가시나가 왜 이러노?” 매운 손매와 꾸짖는 소리가 내 마음에 내리꽂혔다. 나는 비로소 젖을 끊을 수 있었지만, 그 후 엄마의 사랑을 늘 의심하며 살아야만 했다. 내 욕구가 좌절될 때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고 날이 갈수록 확신으로 굳혀갔다. 그 마음이 나를 가두었다. 의심하는 눈으로 본 세상은 그렇게 해석되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점점 키워갔다. 엄마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그 마음을 증명하는 일들만 자꾸 생겨날 뿐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품을 가늠할 수 없기에 자꾸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고운중에는 왕눈이 샘이 있다. 왕눈이 샘을 볼 때마다 나는 방정환 샘의 모습을 상상한다. 조선조 선비 박지원을 생각하기도 한다. 어쩌면 왕눈이 샘의 몸속에는 방정환 샘의 DNA나 박지원의 DNA가 스며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공동체 회의 시간이 끝나고 올해 지구 날을 생각해보기 위해 영화 ‘알바트로스’를 빌려 보는 시간이었다. 망가지고 있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착한 습관 하나라도 함께 실천해보자는 의도로 마련한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끝까지 집중하기에 힘든 영화였다. 겨우 여학생 두셋 정도 반듯하게 앉아있다. 대부분은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비틀고 엎드리고 몰래몰래 장난치고 있다. 애가 쓰인 나는 달래고 부탁하다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다 보았다. 한 아이가 왕눈이 샘 무릎에 누워있다. 왕눈이 샘은 커다란 손으로 그 아이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 편안한 얼굴이다.

아이는 어른의 품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그 품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기에 늘 의심한다. 단지 우리 어른들이 할 일은 품에서 날뛰며 자라는 아이들을 향해 시시때때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왕눈이 샘 옆구리에 늘 둘 셋 아이가 딱 붙어 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 절로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 샘이 누구에게 했다는 말이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행복해요.” “그리고 강아지 백 마리쯤 풀어놓은 것 같답니다.”

그 말이 요즘 우리 학교 모습을 너무나 잘 담고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통쾌하게 웃어버렸다.

신미옥 울산고운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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