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17)]우연한 삶 필연적인 죽음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죽음이지만
코로나 시대 한없이 가벼운 죽음
타인의 아픔 가벼이 여겨선 안돼

2021-05-11     경상일보

친구의 부음을 들었다. 자식들에게 투병사실을 숨길 정도로 강한 정신력으로 암과 싸웠다고 한다. 평소 그의 성품에 비추어 예상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보다 가족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더 염려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여진다. 다행히 그는 맑은 날 강이 내려다보이는 병실에서 어린 손자의 손을 잡아보고 평안하게 갔다고 한다. 떠날 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세상살이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가족들의 대소사를 알고 있는 친구의 죽음은 몇 마디의 조문이나 부의금 봉투로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지인들의 죽음에 대해 민감해 지고 남의 일 같지 않은 감정을 느낀다. 특히 동년배의 죽음을 접하면 왜 그리 일찍 떠나게 되었는가 하는 망자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가족들이 겪을 상실감이 너무 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함께 일어난다. 자녀들의 결혼과 같은 가족들의 상태가 가장 먼저 걱정되는 일이다. 자신의 가정이 생기면 슬픔을 극복하는 일이 좀 더 빠르고 쉬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혹시 어린 자녀라도 있으면 앞날에 대한 걱정은 자신의 일처럼 깊어진다. 이 모든 감정의 바탕에는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이 죽음은 질병의 고통뿐만 아니라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의 염려와 불안, 절망과 좌절을 동반하는 짧지 않은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과정이 가져오는 분위기를 애써 잊어버리고자 노력한다.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가장 먼 시간에 경험하길 원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죽음은 반드시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이 서양의 사유처럼 극명하지 않는 동양적 사고에도 죽음에 대한 태도는 비슷하다. 흔히 인간은 살아서 오복(五福)을 다 누리길 원한다고 한다. 오래 사는 것, 재물을 얻는 것. 편안하고 안락한 것, 덕을 가지는 것과 더불어 오복의 마지막이 고종명(考終命)이다. 살만큼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 구조는 동서나 고금을 가릴 것 없이 비슷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현대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상을 당하면 영안실에서 잠시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삶의 허무함을 되새겨보지만 죽음의 여운은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다. 매순간 맞이하는 삶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듯이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체험하는 죽음의 의미가 그리 절실하지 못하고 깊은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상을 건강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보다는 적당한 정도의 호기심과 매사에 똑 부러지지 않는 애매한 태도, 그리고 어떤 심각한 상황도 지나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죽음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정도의 생각과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삶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특히 요즈음과 같이 집단적인 죽음이 TV화면을 통해서 매일 안방에서 재현되고 있는 때에는 더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지금 인도에서는 주검을 태우는 연기가 도시를 뒤덮고 있다고 한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까운 친구의 죽음과 같은 무게로 다가올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듯이 현장에 달려가 이들을 돕는 것도 현실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 주는 진리의 현장을 TV속의 화면으로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는 것은 너무 무심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가벼운 죽음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조금씩 바꿀 수 있다면 개인과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