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부모님의 반지
나는 빛을 잃은 오래된 누런 금반지 네 개를 갖고 있다. 네모로 각이 잡힌 하나는 남자 반지다. 동그란 모양에 보라색 수정이 박힌 쌍가락지와 무늬 없는 한 개는 여자 반지다. 내 손가락에는 맞지 않아 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팔 수 있는 반지는 더더욱 아니다. 친정아버지와 엄마 반지다. 그냥 갖고만 있은 지 벌써 10년 되었다.
엄마는 햇수로 7년 동안 노환을 앓았고 그중 두 해 동안은 걷지 못하고 엉덩이를 밀어 방에서 마루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요양보호사를 불러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더 불편하다며 싫다고 했다. 아버지 요청대로 요양보호사는 오지 않았고 엄마 수발은 아버지가 맡으셨다.
친정집은 동남향이다. 아침에 방문을 열면 햇살이 들이비쳤고 동리 들녘과 멀리 산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엄마는 엉덩이를 밀며 문지방을 넘어 마루에 나와 앉아서 햇살을 맞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일이었다. 그러다가 병세가 심해지면 자동차로 두 시간을 넘게 달려 대전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하기를 반복했다. 친정집 가까운 도시에 오빠들이 살고 있었고 급하면 달려갔었다.
나는 결혼해 멀리 살고 있다는 핑계로 한 해에 두세 번 엄마를 찾아가 볼 뿐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아픈 엄마를 보러 갔다. 퇴근하고 울산에서 출발해 친정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나를 불러 앉히고는 장롱 서랍을 뒤적여 신문지에 돌돌 만 것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버지도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말없이 빼서 엄마한테 내밀었다. 엄마는 아버지 반지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엄마 이걸 왜? 왜 저를 주셔요. 그냥 엄마 끼고 아버지도 끼고 계셔요. 아니면 나중에 큰 올케 주셔요.”
“오빠들한테도 아무 소리 말고 갖고 가, 팔아봐야 돈도 많지도 않고 올케가 셋이나 되는데 누굴 주냐? 괜히 이게 있는 줄 알면 그것들 맘만 상하지. 그냥 네가 갖고 가.”
엄마는 그렇게 반지를 내게 주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었던 것 같았다. 그 해가 지나고 새해 봄이 시작될 즈음 엄마는 돌아가셨고, 다음 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반지를 받았을 때는 팔아서 예쁜 반지를 만들어 껴야지 했었다. 아니면 팔아서 뭘 할까 궁리도 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유품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랐다. “너를 높은 학교에 못 보내서 미안했다. 지금만 같았으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보냈을 텐데…. 혼자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못 가는 사정을. 그 오지 산골 우리집 형편에 대학은 꿈도 뭇 꿀 일이었음을 안다. 그래도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었고 부모님 원망을 많이도 했었다. 아버지는 가끔 술에 취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엄마는 부질없는 소리라며 나를 모질게 나무랐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철없는 소리를 한다면서.
엄마는 하늘나라로 갈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평생을 가슴에 미안함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원망할 때 그렇게도 냉정하게 나를 몰아세웠는데 엄마 가슴에 그런 응어리가 있는 줄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다. 반지를 받으면서도 ‘이제 미안하다면 뭘 해’라는 마음이 더 컸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빈자리가 이렇게 다가올 줄 몰랐다. 엄마와 사이가 좋아서 못 보면 못살던 살가운 딸도 아니었고 엄마 또한 불면 꺼질까 애지중지하며 날 봐주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엄마 생각이 났다. 그냥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고 엄마,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없음에 가슴이 저렸다.
나는 가끔 엄마, 아버지가 생각나면 반지를 꺼내 본다. 엄마, 아버지가 그 반지를 처음 손가락에 끼고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해 본다. 얼마나 오래 끼고 있었는지 동그란 반지가 닳고 닳아서 링이 고불고불 모양이 틀어진 것도 한참을 들여다본다. 지금만 같아도 그깟 금반지 하나쯤 해드릴 수 있는 형편인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엄마라도 지팡이를 의지하고 걷는 아버지라도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성제 울산 울주군 범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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