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악의 평범성과 사유하는 삶

2021-05-14     경상일보

1960년 5월, 한 남성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고, 1961년 4월, 예루살렘 법원에서 15가지 죄목으로 공개재판을 받게 된다. 그가 바로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본 후,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이라는 책을 발표한다. ‘악의 평범성’,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아렌트는 재판 과정 중에 아이히만이 보여준 태도와 언어에 이상한 의문을 품게 된다. 어떻게 저렇게 평범한 남자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른바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아이히만은 외판원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지휘관으로 입신양명하고 싶은 마음에 나치당에 입당한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에게 특별한 혐오의 감정도 없었고 어떠한 정신적인 이상 증상도 없었다. 그는 포악한 성정을 가진 악인의 모습도 아니었고 살육에 번득이는 악의 화신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신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정에 ‘충실’하려 했을 뿐인 중년의 남성이었다. 유대인 학살은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진술할 때마다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을 보였고, 이 말하기의 무능력은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관료 체제에서 ‘규정된 말’만 사용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복종을 의무로 여기고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만 하는 그러한 관료였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일’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에게서, 즉 그의 ‘사유의 무능력’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기원을 찾았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유하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악’을 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의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도 어떤 ‘악마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일상적’ 인간의 ‘무사유(無思惟, 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악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무사유’에 있다는 의미다. 평범한 일상인일지라도 자기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사유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자신도 모르게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사유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서 옳고 그름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이다. 사유는 자신의 ‘참된 실존’과 우리의 ‘좋은 사회’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사유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지 않는 양심을 갖게 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하게 하며, 기만이나 위선에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한다. 따라서 사유는 인간의 ‘품격(品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사유하지 않는 삶이, 사회적 통념에 따라 ‘대중’으로 살아가는 삶이 오히려 안락과 편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사유하지 않는 삶은 선동과 현혹에 쉽게 휩쓸려서 남의 생각을 나의 생각인 양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유는 ‘자신의 세계’로만 빠져 들어갈 경우 자기 의견만 옳다는 ‘주관적 신념’에 갇힐 수 있다. 사유는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사유’가 될 때 ‘공허한 환상’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는 사유가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유’, 이러한 ‘타인의 생각과 함께 하는 사유’야 말로 ‘악의 평범성’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 상대방 입장에서 사유하는 능력이 없을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끔찍한 ‘악’이 언제든지 다시 평범하게 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크고 작은 ‘악’을 멈추게 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엽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