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물구나무선 사회의 비가(悲歌)
6년 전쯤 영화 ‘암살’을 본 적이 있다. 1000만을 훌쩍 넘긴 관람자 다수는 아마 수십 년 묵은 응어리를 풀어내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투사 안옥윤(전지현)이 밀정 염석진(이정재)을 처단하는 마지막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옆자리 정숙한 숙녀분이 손뼉을 칠 정도였으니.
격한 공감이 들기도 했지만, 속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불길하게 이어질 우리의 미래 모습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제 부역자와 연관자는 물론이고 그들의 제도와 관행과 문화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슬픈 역사를 저런 식으로 정리해 버려도 되나?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영화가 부역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역사의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포기의 ‘마취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
요즘 세태를 보면 마치 해도(海圖)가 없는 바다를 오로지 욕망을 좇아 떠도는 해적선 무리가 난무하는 듯하다. 유독 끔찍한 것은 정체성을 감춘 말들이 줄이어 배설되는 행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게다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별 고민이 없는 듯하다. 하기야 고민한다고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설령 나온다 해도 어차피 이해관계를 따를 테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다. 그런 태도가 문화가 되고 주술로 굳어지면 온갖 ‘야바위’가 잉태되고 서식하는 음습한 사회생태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도둑이 매 든다’ 혹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라는 속담은 그런 어이없는 세상에 대한 풍자적 교훈이다.
역사에 재갈을 물리고 고약한 짓만 골라 일삼는 자들의 뻔뻔스러운 목소리가 용인되는 사회는 극도로 부도덕한 사회다. 과거에는 해방된 조국에서 부역자들이 독립 지사에게 훈장을 주고 동포를 살해한 독재자를 영웅으로 둔갑시켰다. 최근에는 독재의 주구였던 자들이 민주주의와 법치 운운하고, 불공정과 특권의 세례를 받았던 자들이 공정과 정의를 말하고, 외세에 빌붙어 민족의 영혼을 팔았던 자들이 독립적 태도를 사대주의라 비난하고, 인권을 짓밟은 자들이 인권 보호를 들먹이고, 민족과 민주와 정의를 정치 이념의 제물로 삼았던 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친다. 이런 ‘코미디’ 같은 사회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치유가 절실한 이유다.
그런 병든 사회를 고치고 바꿔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책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의 책임 또한 사회를 병들게 만든 자들 못지않게 크다.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눈치나 보며 사익을 도모하는 짓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적 이분법적 세계관과 문화에 찌든 시대를 넘어서는 일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소임이다. 좌든 우든, 여든 야든, 친중이든 친미든,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근거가 된 ‘적과 동침’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적 진로를 설계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래야 중미 경쟁은 우리의 고립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활동무대를 창조적으로 넓힐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의 험악한 정치문화 또한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건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제가 있다. 역사적 잘못을 짚고 털어내는 일이다. 때를 놓치면 그 폐해는 ‘재에 덮인 불씨처럼 두고두고 타면서’ 큰 짐이 될 것이다. 이솝 우화의 한 대목을 보자. 어느 겨울날 한 농부는 추위에 온몸이 얼어 감각을 잃은 독사 한 마리를 발견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독사를 집어 자기 가슴 속에 넣었다. 독사는 따뜻한 온기에 다시 살아나자마자 치명적인 독 이빨로 은인 농부를 물었다. 가련한 농부는 죽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독한 짐승에게 연민의 정을 주었으니, 자업자득이지.” 우리가 죽어가는 농부의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역사적 잘못’을 제대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김정배 (사)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