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백결을 영해박씨 선조로 볼 신뢰할만한 사료 찾을 수 없어

2021-05-28     홍영진 기자

<양단세적>이 인용한 ‘화동인물총기’와 <화해사전>을 살펴보자. ‘화동인물총기’는 원천석이 총괄하고 범세동이 편집했다는, 도학(道學)을 익히고 충절을 지킨 신라·고려의 인물과 고려말의 숨겨진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앞에서 살핀대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삼강행실>에는 박문량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이만도가 보았다는 <단구박씨세적>의 백결은 ‘화동인물총기’에 실린 기록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구박씨세적> 편찬자가 ‘화동인물총기’에 실린 백결을 여기에 옮겨 싣고, 이만도가 이를 <양단세적>에 실었던 것이다.

정체불명의 신현과 화동인물총기·화해사전

박기태가 찬술한 <양단세적> ‘발문’에 따르면, 백결선생의 사적은 운월재 신선생((雲月齋 申先生)의 원고에서 찾아 쓴 것이라 했다. 운월재 신선생은 고려 말의 신현(申賢·1298~1377)인데, 그의 언행과 문자를 모아 엮은 책이 <화해사전>이라 한다. ‘화해사’란 중국의 원·명, 그리고 동해 즉 고려의 스승이라는 뜻이니, 신현 자신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해사전>이란 화해사 신현과 관계된 모든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화해사전>은 신현의 문인 정몽주가 원천석에게 전해 원천석과 범세동이 이를 간행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 말 혼란한 상황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선 건국과 함께 후손들 또한 몰락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다. 1860년 신현의 후손 신태숭 등이 7권 4책으로 간행했는데, 6·7권 1책 98장(張)만 전해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다.(奎 12393) 1920년 이항직이 <화해사전> 1~7권 전질을 발간했고, 1932년 강영직이 교정하여 발간했는데, 모두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화해사전>의 권3, ‘출처(出處)’ 항목이 바로 ‘화동인물총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에서 본 <양단세적> ‘발문’에서 백결의 사적은 신현의 원고에서 찾아 썼다는 것은 바로 이 ‘출처’ 항목을 말한 것이다. ‘출처’는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거나 은퇴함을 말한다. 이만도가 1910년에 발간한 <양단세적> ‘서문’에서 백결을 언급한 것은, 1860년에 간행한 <화해사전>의 이 ‘출처’ 항목이 1869~1910년의 ‘단구박씨세헌’에 실려있어 이를 근거로 서술했음을 말해준다.

‘출처’의 ‘백결선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현)선생이 성공필에게 말했다. ‘신라인 박문량(곧 목숨을 바친 제상의 아들이다.-원주)은 세상에서 백결선생이라 하는 사람이다. 그의 출처를 보면 오로지 올바른 소견(正見)에서 나왔다. 옛날에는 간언과 상소를 잘 하는 사람이 드물어 이훈(伊訓)과 열명편(說命篇)을 모범으로 삼았으니, 만세에 임금된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은 백결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위서 <화해사전>의 백결선생 조작

이훈은 <서경>의 한 편명인데, 상(商)나라 왕 태갑이 즉위할 때 재상 이윤(伊尹)이 시정의 방침으로 주었다는 가르침이다. 열명편 역시 <서경>의 편명으로 노예 출신 부열(傅說)이 상나라 왕 무정(武丁)을 보좌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루게 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두 현인의 공통점은 왕을 잘 이끌어서 선정을 베풀게 했다는 것이다. 정현은 이 고사를 통해 박문량이 자비왕에게 이윤과 부열처럼 간언하는 상소를 올린 명신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신현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신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웅호걸은 김유신만한 인물이 없고, 광명정대하기로는 김양(金陽)만한 사람이 없는데, 백결선생은 양자를 겸비한 사람이다.” 김양은 신라 말기 왕위쟁탈전에서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살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킨 인물이다. 그를 광명정대한 인물이라 칭송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이어 박문량의 자비왕에 대한 상소문을 실었는데, 일괄하면 임금이 바른 마음을 가지고 천도(天道)를 따르며 신하의 간언을 수용해야 재앙을 물리치고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소의 용어와 내용이 신라 초기에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 언관(言官)의 간언이나 유생의 상소문과 다름없는 유교적 왕도정치론이다.

<화해사전>은 어떤 저술인가? 우선 편찬자 신현이 정몽주의 스승이라는 데서 의문이 생겨난다.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동방도통도(東方道統圖)’는 단군 → 기자 → 설총 → 최충 → 김양감 → 안유 → 우탁 → 신현 → 신용희·정몽주·이색으로 되어있다. 김양감은 고려 전기 선종조 인물이지만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아니다. 정몽주·이색이 신현의 제자라는 말도 생소하거니와, 이들과 나란히 위치한 신용희는 바로 신현의 아들이다.

정몽주나 이색의 학통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신현이 안향과 우탁의 도통을 이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신현이 유학사에서 이처럼 비중있는 인물이라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사서에 등장하지 않을 리 없는데,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정몽주의 <포은집>과 이색의 <목은집>에는 이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여말선초 다른 유학자들의 저술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하여 자신의 아들을 정몽주와 이색에 비견한 것도 아전인수 혐의가 짙다.

<화해사전>의 마지막에 ‘언지록(言志錄)’이 실려 있는데, 여말선초 신왕조에의 출사를 거부하고 은거했다는 이른바 ‘두문동 72현(賢)’을 서술한 것이다. 조선시대사 연구의 권위자 이수건 선생은 “두문동 72현 문제는 18세기에 이르러 조작된 것이며, 결코 사실로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언지록’을 실은 <화해사전>도 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편찬한 책이니 당연히 신현의 저술일 수 없다. 선생은 다시 <화해사전>과 ‘화동인물총기’ 등을 “진위와 허실을 검증하지 않은 문헌자료란 위험하다. 이들을… 사료로 이용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여 위서임을 분명히 했다.

영해박씨 <양단세적>이 박문량-백결을 수용

<양단세적>에는 출전을 <화해사전>이라 밝히고 백결을 ‘운월재신선생여설성공필(雲月齋申先生與說成公弼)’과 ‘화동인물총기’로 나누어 실었다. ‘발문’을 쓴 박기태는, ‘화동인물총기’의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신라사에는 백결선생 이름이 없는데, 근자에 ‘화동인물총기’를 얻어 보니 세계(世系)가 자못 명백하다.… 그러나 누구의 저술인지 알 수 없다가… <화해사전> 초본을 보고는 운월재 신선생 문인들이 선생의 논변과 문답을 기술한 것임을 알았다. 성공필의 문답도 여기에 들어있었다.…” 박문량-백결의 논거를 <화해사전>이라 밝힌 것이다.

송수환

이처럼 박제상의 아들 박문량-백결은 영해박씨 가문이 <화해사전>…을 근거로 해서 현조(顯祖)로 찬양했지만, 이 자료가 전거가 분명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꾸며낸 위서(僞書)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백결을 박제상의 아들로 분식하는 일은, 가문으로서는 선조 현양이며 양산으로서는 향토문화 진흥이겠지만, 학문적으로는 역사 왜곡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성어를 되새길 때이다.   송수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