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수사공 이종실과 고산정사

2021-06-07     경상일보

울산사람들 중 충숙공 이예 선생은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아들 수사공(水使公) 이종실(李宗實)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수사’라 함은 그의 벼슬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줄임말이다. 울산사람들이 충숙공은 잘 알면서도 수사공을 알지 못하는 것은 수사공의 선양사업이 최근에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충숙공을 이어 조선 초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수사공은 두 가지 요건으로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첫째 그의 순직과 장례를 두고 한일 간 국서가 오갔다는 사실이며 둘째 수사공이 아버지와 함께 2대에 걸쳐 외교관으로 국가에 봉사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발간된 <학성세고(鶴城世稿)>는 수사공의 일생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공은 충숙공 학파 이예 선생의 아들로 울산부 서오리 말응정에서 출생했다.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다. 세조 5년(1459) 10월8일 새벽 정사(正使) 송처검(宋處儉)과 함께 통신부사로 일본국에 가다가 정오경 대마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선단이 침몰하는 바람에 순국하였는데 나라에서는 예관을 파견해 그 혼을 불러오게 하여 성대하게 예장을 치러주었다. 일본 국왕도 세조 9년(1464) 7월 조선통신사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경도의 천룡선사 승 준초에게 명하여 통신사 일행의 명복을 빌어주는 수륙대재회를 열어주고 국서를 보내왔다.… 공의 이력은 학성지, 울산읍지, 수사공실기 등에 전하며 묘소는 오래전 실전되었다가 1924년 겨울 울주군 온양면 내고산리 소재 수사등에서 공과 관련된 지석이 발견되어 그곳에 설단하고 1950년 1월 하순 고산재를 건립해 매년 한식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한일 간 국서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일은 없다. 또 부자(父子)가 2대에 걸쳐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집안도 흔치 않다. 공의 몸은 비록 이역만리 풍랑 속에 쓰러졌지만 바닷길 위험을 무릅쓰고 국서를 전하기 위해 나섰던 공의 충절과 울산과 교토를 잇는 역사의 인연은 오늘도 울산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렇게 보면 수사공을 기리는 고산정사는 울산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고산정사는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에 있다. 최근들어 ‘조선시대 통신사 이종실 선양회’(회장 이두철)가 발족되었고 수사공의 업적을 선양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수사공의 재실은 건립 후 고산재(高山齋)로 불리어 왔으나 지난해 ‘고산정사(高山精舍)’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지난해 3월 회당 장석영 선생 문집에서 ‘고산정사기(高山精舍記)’와 문암 손후익 선생 문집에서 ‘고산재사상량문(高山齋舍上樑文)’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정종섭 전 행자부 장관의 글을 받아 편액을 창건기문과 동일하게 고산정사로 고쳐 쓰고 회당 선생이 지은 창건기문과 문암 선생이 지은 상량문을 대청마루 상단에 나란히 게시했다. 울산시도 지난해 수사공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고산정사 가까이 있는 수사등에서 수사공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모임에는 송철호 시장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이런 울산시와 수사공 선양회의 움직임에 비하면 아직도 울산시민들 중에는 수사공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고산정사에는 현판, 기문, 상량문 등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유물들이 많다. 고산정사 편액을 쓴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전 행자부 장관) 집안은 경주 출신으로 누대의 명필로 알려져 있고 이번에 새로 써 걸어둔 고산재사상량문 역시 명문장으로 알려져 고산정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과거 한일관계 역사와 함께 수사공의 족적을 돌이켜볼 수 있다.

현재 수사공 추모비와 단소(壇所)가 있는 수사등은 울산에서도 풍광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최근 코로나 창궐로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은 피하고 있는데 이런 때 울산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조선 초 한일관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적한 고산정사를 찾아 수사공의 업적을 돌이켜 보면서 역사의 상념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