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비는 많이 내려도 탈, 안 내려도 탈

기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올 들어 일본은 65년 만에 가장 이른 장마를 맞이했고, 우리나라도 거의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기록을 살펴보니, 5월 들어 0.1㎜ 이상 강수량을 기록한 날이 14일이다. 강수일수론 역대 1위 기록이다. 하루 걸러 한 번 이상 비가 내린 셈이다. 지난 3월부터 4월 중순까지 측정한 강수량이 예년의 2배란다. 그 덕분에 농업용 저수지의 저수율은 평년의 110%, 다목적 댐은 125%를 기록하면서 모내기 철에 항상 겪는 물 부족 현상을 건너뛰게 됐다.

‘농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옛말이 있다. 슈퍼컴퓨터가 기상정보를 예측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이 말이 적용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심한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수확량이 크게 떨어진다. 수확기에 태풍이라도 오면 한 해 농사를 망친다. 이렇듯 농사에는 비가 많이 내려도 탈, 안 내려도 탈이다. 그나마 올해처럼 잦은 봄비가 내리면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많은 물이 필요한 논농사에는 긍정적이어서 농민들이 조금은 시름을 덜게 된다.

하지만 봄비가 과수에는 재앙이다. 비가 내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작아지고 당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과수화상병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니 하늘에 달렸다고 할 수밖에. 나무가 타버린 듯 말라 죽는 과수화상병은 별다른 치료법이 없어 가축병인 구제역처럼 확진 판정을 받으면 매몰 처리해야 한다. 과수 한 그루에만 증상이 나타나도 반경 100m 이내의 과일나무를 모두 묻어야 한다. 해마다 그만큼 과수 재배면적이 줄어들면 과일값은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면 제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긴 장마는 특정 산업에 악영향을 미친다. 비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표 업종은 당연히 건설업이다. 비가 내리면 건설 현장은 올스톱이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건설업 생산지수는 지난해 7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4%, 8월에는 11% 감소했다. 장마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야외에서 많이 작업하는 조선업의 가동률도 지난해는 급감했다.

반도체 산업은 정반대다. 최근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세계 각지의 자동차 공장이 멈춰선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물이다. 반도체는 여러 공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발생하는 각종 부스러기나 화학물질을 씻어낼 많은 물이 필요하다. 인근 저수량이 부족해지면서 반도체 공장 가동률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가뭄뿐 아니라 한파가 닥쳐도 물 공급은 비상이 걸린다. 올해 초 미국 남부 텍사스주에 이상 기온으로 한파가 불어닥치자 삼성전자의 오스틴 반도체 공장이 한 달 동안 멈춰 섰다. 예상치 못한 한파에 수도망은 물론 하천까지 얼어붙으면서 물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공장 가동 중단으로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생산 활동에서 물의 중요성은 반도체뿐 아니라 제철·제련, 석유화학, 수력·원자력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맞물려 물 부족 사태는 기업들이 우선 관리해야 할 리스크가 되었다. 특히 울산 주력산업인 석유화학단지엔 공업용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사람에겐 먹는 식수가 생명줄이듯 공장엔 공업용수가 없으면 가동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에 따른 극심한 가뭄으로 겨울철의 낙동강 원수 수질이 많이 나빠졌다. 그러면 기업은 양질의 공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해선 불순물을 처리하는 시간이 그만큼 더 소요된다. 실제로 2018년초 겨울에는 공업용수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공장 가동을 줄여야 할 위기까지 맞았다.

기업이 개별적으로 물공장을 증설하려면 부지확보에 어려움이 있고, 물공장 운영에 따른 초기 투자비용과 원가상승 문제도 걸림돌이다. 이에 RUPI(울산석유화학산업 발전로드맵) 사업단에서는 2013년부터 울산 맞춤형 공업용수 통합공급시설 구축 방안을 꾸준히 제시해왔다. 그 후 상황이 바뀌어 낙동강 물 대신 하수처리장 방류수를 재이용해 공업용수로 활용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방류수를 재이용하면 일석삼조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하루속히 ‘통합 물공장’ 착공으로 공업용수 부족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고, 새로운 기업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도 이루자.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RUPI사업단장·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