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역사전쟁의 민낯
또다시 ‘역사전쟁’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하기야 큰 선거가 있으면 어김없이 벌어진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뜬금없이 ‘해방군’ ‘점령군’이 무대에 등장했다. 어떤 정치적 노림수 없이 불쑥 던진 말은 아닐 것이다. 책임 있는 정치인과 언론인, 전직 고위 관리와 일반 시민, 그리고 역사학자까지 참전하는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물론 역사전쟁 자체야 나쁠 것이 없고 전환기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전개된 혁신주의운동(Progressive Movement)이 적절한 예다. 남북전쟁 이후 급속한 독점자본주의 발전으로 미국 사회는 독점과 정경유착, 부패와 인권유린이 극에 달했다. 그런 폐해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 각 부문과 주 및 연방 차원에서 개혁이 전개된 것이다. 그것은 달리 보면 전통과 권위, 기득권의 해체 과정이었다. 당연히 개혁을 정당화할 논리가 필요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비어드(Charles A. Beard)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1913>에서 당시까지 미국인에게 신성시되던 헌법이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문서라는 주장을 내놓았데, 이것이 개혁의 ‘사상적 무기’ 역할을 했다. 거짓 역사지식과 그것에 기초한 제도와 문화는 결국 깨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문제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저급한 역사전쟁이다. 무지와 신념, 정치적 의도에 사로잡힌 사실 왜곡과 ‘멋대로’의 해석은 생산적 결과는커녕 국민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히기 마련이다. 최근 해방 공간의 미군 관련 주장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한쪽에서는 국가 정통성과 한미동맹 심지어는 글자번역까지 들먹이고, 다른 쪽에서는 맥아더 포고령 이외에 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점령군을 강변한다.
역사문제를 다룰 때는 각별히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작금의 논쟁이 놓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논쟁 당사자 미국은 자신의 군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자유 독립 한국’(free and independent Korea)’을 선언한 이후 1949년 6월 미군을 철수시킬 때까지, 미국은 국가안보회의 문서를 비롯한 주요 정책문서에서 ‘점령군(occupying force, U.S. occupation forces in South Korea)’ 말고 다른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미군과 소련군은 합의에 따라 “일본군 항복을 받기 위해”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유엔은 미군과 소련군을 어떻게 보았는가? 1947년 11월14일 유엔총회결의안은 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한 이후 ‘점령 당국(occupation authorities)’의 정부 이양과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점령군 철수(withdrawal of occupation forces)’를 주문했다.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1948년 12월12일 유엔총회결의안 또한 미국과 소련을 점령국(occupation Powers)으로, 그들의 군대를 점령군(occupation forces)으로 표기했다.
셋째, 조소앙(상해임시정부)과 이승만(미국위원부)은 미소 점령군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들은 점령군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고 미 점령군과 협력을 원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recognition)’과 유엔 참여, 대일전 마지막 단계에서 한국인의 역할 등에 대한 요청이었다.
점령군 논쟁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번지고 있는 근저에는 ‘역사인식의 빈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의 ‘해방’과 ‘독립’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해방이 곧 독립이라 믿은 한국인에게 미군과 소련군은 ‘해방군’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해방보다 군정(military government)에 초점을 둔 ‘점령군’이었다. 군정이 조선총독부를 대체한 것이다.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그 군정을 이양받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 ‘합법’ 정부로 승인받고서야 비로소 독립이 인정되고 국제법적 국가(international person)가 된 것이다. 좌든 우든, 여든 야든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해방 공간의 현실과 역사성에 대해 ‘미래지향적’ 논쟁을 하기 바란다.
김정배 (사)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