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대학의 존재 이유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처럼 올해 지방에는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한 대학들이 속출했다. 입학 연령 인구가 입학 정원에 미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대학들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조응하는 교육혁신을 추진하는 동시에,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많아 취업이 쉬운 학과들을 신설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많은 대학들은 인문사회 및 예술 계열 학과를 없앤 후 공학 계열 학과를 신설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대학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인재나 산업 현장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공직업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이 ‘취업전문학원’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이는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학(Universitas)은 12세기 중세에 탄생했다. 고대 아테네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있었고 9세기에 샤를마뉴(Chalemagne)가 세운 카롤링거 궁정학교도 있었지만, 12세기의 대학은 규모, 제도, 성과의 측면에서 비할 바 없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발견과 교회법 연구,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수학의 연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연구 등을 위해 12세기 무렵부터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이 생겨났고, 이후 200~300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학의 틀이 정립되었다.
그 당시 대학은 ‘직업적 훈련’이라는 목표와 ‘전인적 인간 교육’이라는 목표가 조화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발전되어 나갔다. 대학은 자유 7과, 즉 3학(trivium-문법, 수사, 논리)과 4과(quadrivium-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자유교양(liberal arts) 과정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교육을 이수한 후 법학, 의학, 신학 분야로 진학하게 했다. 처음에는 도시들이 대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부터 특히 상업도시들은 복잡한 법률문제를 해결할 법률전문가를 필요로 했고, 도시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행정가들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대학 학위는 교회나 세속적 기관에서 어떤 직책을 얻기에 유리한 자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학이 직업교육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법학, 의학, 신학을 하기 전에 자유 7과를 기본이수과목으로 정한 것에 나타나듯이, 대학은 전인적 인간 교육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독일의 베를린 대학(1810년 창립)은 근대 대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 대학을 세운 빌헬름 폰 훔볼트는 18세기 중반 산업혁명 시기에 대학을 전문학교나 직업교육의 장으로 몰아가는 경향에 강하게 반대했다. 19세기 후반 니체도 역시 당시의 대학이 독일의 산업화에 부응하기 위해 인문교양교육을 약화시키고 단순히 노동인력을 배출하는 직업교육기관으로 변질돼가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1872)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환경에선 대학이 전공직업교육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이 대학교육이 전공직업교육에 편중될 때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전문영역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이해나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는 ‘전문가 바보(Fachidiot)’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혼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막스 베버)을 낳을 수도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대학들은 물론이고, 하버드 대학 등 현대의 거의 모든 우수한 대학들은 인문교양교육에서 출발해 전공직업교육으로 나아가는 틀 속에서 지성, 감성, 덕성을 겸비한 전인적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 대학 존립을 위한 불가피한 방향이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대학들, 특히 지방대학들이 ‘좋은 취업전문학원’으로 ‘거듭나길’ 원한다면 대학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대학이 자유로운 인문교양교육과 실용적인 직업교육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낼 때 비로소 ‘좋은 대학’이 될 것이고, 이로써 대학의 위기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엽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