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벌초(伐草)
벌초는 풀을 베는 일이다. 한 더위가 살짝 고개를 숙이면 논밭 주변이나 조상의 묘소에 많이 자란 풀들을 제거한다. 타향에서 살다가 추석을 맞아 귀향(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행사)하여 추석 전날 선영(먼저 세상을 떠나신 조상)의 산소에 벌초를 한다. 이 행사는 제사와 더불어 조상을 모시는 행사이다. 지금과 같은 산업 사회에서는 성장한 자식들이 각자의 전공을 찾아, 일자리와 근무지 또는 삶의 터전을 옮겨서 생활한다. 이 때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조상의 산소를 돌보는 것이다.
울산을 비롯한 각 지역에는 집성촌을 이룬 집안이 많다. 윗대 조상의 산소는 종친회 또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일 년에 두 번씩 벌초를 한다. 하지(夏至)를 기준으로 중간벌초를 하며, 처서(處暑)가 지난 후 잡초의 씨가 영글기 전에 날을 잡아 벌초를 한다. 보통 양력 8월말 일요일에 날을 잡아 벌초를 하며, 벌초군들이 부녀회원들과 함께 많게는 백 이십 명 정도가 된다. 예초기는 열 대정도가 청년들에 의해 돌아가며, 여유 있는 인원은 갈구리로 베어진 잡초를 옮기는 일을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한두 번 정도의 잡초를 옮긴 후 나무그늘에서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지, 숙질들과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후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가계별(家系別) 조상 산소로 벌초를 가는 것이다. 이 때 어깨에 힘을 많이 주는 어른이 계신다. 아들을 많이 데리고 오며, 심지어 손자까지 손을 잡고 오는 어른도 계신다. 자기 자손의 번성함을 이때 자랑하는 것이다.
필자의 집안은 울산 남구 여천오거리를 중심으로 사백여 년 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임란을 겪으면서 집안 어른 중 부자(父子)가 함께 몸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구했다. 의(義)를 중시했던 그 분들의 위패가 지금도 울산 충의사(忠義司)에 모셔져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 조직은 깨어지지 않았다. 집안의 중심이 되는 어른이 식솔들의 안전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며, 단합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집안사람들을 당시 일본 통치자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조용했던 시골 울산이 1960년대 나라에서 정한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근대화 물결이 불었다. 이때 흩어져 있던 조상의 산소를 한 곳으로 모았다. 그 토지 보상으로 받은 자금으로 화수회(禾收會) 또는 종친회 이름으로 토지와 건물을 매입했다. 여기에서 나오는 잉여자금으로 종친회를 운영한다. 나라에서는 비법인 단체(非法認 團體)로 종중재산을 보호해 준다. 또한 공동재산의 운영과정을 숨김없이 공개하여 문중에 믿음을 얻었다. 당시 개인의 이름이나 종손의 이름으로 받은 보상자금은 지금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후손들의 기업운영 자금이나 정치활동 자금으로 소멸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재산의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거나, 문회(門會)의 의논 없이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중재산은 먼저 본 놈이 임자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벌초행사는 시제(時祭)와 더불어 집안 혈족 간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행사이다. 때로는 정치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한다. 요즈음 벌초행사가 많이 사라졌다. 벌초를 위한 젊은이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난 고인(故人)을 위하여 좁은 국토를 배정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란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신(神)의 유무(有無)를 떠나서 세상을 떠나신 조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처이다. 그리고 형제자매 친척들이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한 국민안전 방역기간으로 대중집회(大衆集會)는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국민 방역 단계가 하향 조정되어 친척들끼리의 모임도 완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좋은 계절에, 옥색 도포를 입고 조상의 위패 앞에 도열하여 시제를 지내는 모습을 기대한다.
박현수 울산향교 장의
(외부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