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익충(益蟲)으로 살겠습니다

2021-08-24     경상일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 그 일을 맡는다고 덜컥 승낙했을까.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엔 뭘 채우려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땐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에라, 모르겠다” 하며 종종 일을 벌이곤 했다. 그리곤 후회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비워나갈 때가 아니던가.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라고 설파했다. 나 역시 탐욕과 교만을 멀리하려고 몸부림쳤다.

돌아보니, 제멋대로 산 인생이다. 저 잘난 맛에 제 능력으로 산 인생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자기 능력으로만 산 인생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당연히 도움이 있었다. 누군가 질끈 이쪽의 실수와 부족함을 눈감아준 그 어떤 존재들이 있었다. 그걸 모르고 혼자서 제 능력으로 산 것처럼 오해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심지어 어머니 배 속에서 작은 생명으로 머물러 있을 때도 다른 생명체의 도움 속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의 터전 위에서 그들의 사랑과 돌봄 속에서 살았다. 용서와 관용 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적반하장으로 그들을 속이고 피해를 주면서까지 말이다.

인생은 시간의 집적이고 기억의 집적이다. 시간과 기억, 그것들이 모여 개인의 역사가 되고 추억으로 남으며 인생이 완성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그 시간과 기억의 집적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마치 두 번 세상을 산 것 같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돌아보니 아득한 길이었다. 많이는 지워지고 아직은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나,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나?” 돌아보면 문득 붉어지는 얼굴. “왜 나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가? 왜 그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마냥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후회는 어리석은 자의 푸념이라던데.

이쪽의 생명을 위해 저쪽의 생명을 해치는 삶. 그야말로 악덕(惡德)이다. 해충으로서의 삶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생명체에겐 그런 개연성이 있다. 생각이 이쯤에 와서 머물면 와락 소름이 끼친다. 부끄러움을 넘어선 두려움이다. “어찌해야 할까?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까?” 여기서 회심(回心)이 나오고 각성이 나온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 아니, 제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나이에 방향 전환이 가능할까?” 또 생각하며 성찰했다. 사고와 시점의 전환이다. 전에 그렇게 살던 삶을 바꾸고,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시각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망 없는 인생이 된다.

어차피 인간은 착하지만은 않다. 나 역시 그렇다. 남들에게 그리 보이려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선량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보자. 그마저 없다면 진정으로 좋은 인생이라 하기 어렵다. 나보다 너를 오롯이 우선하기는 어렵다 해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 주일 새벽미사 강론에서 신부님이 “나를 내려놓고 절덕(節德)하며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처럼 와닿는 적이 없었다. 우선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함께 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익충(益蟲)으로 변신해 살아야겠다. 잘 드러나진 않아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생명체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자리이타(自利利他)란 말이 있다. 나한테도 이롭고 남한테도 이롭다는 말. 그런 삶은 쉽지 않고 흔하지도 않겠지만, 그런 삶을 원한다.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원한다. 지금껏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았으니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의 용서와 관용 속에서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불현듯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그러므로 집착할 건 아무것도 없다.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자. 변화는 빠를수록 좋다. 무엇보다도 남을 배려하는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은 내 인생, 그렇게 살고 싶다.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RUPI사업단장,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