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삶을 지탱해주는 기억
지인들과 랜선 안부만 주고받은 지 2년째. “코로나 끝나면 만나자”라는 인사가 “백신 다 맞고 만나자”로 바뀌던 중에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조심스럽게 약속을 잡고 바깥나들이를 했다. 고등학교 친구가 몇 년 간 수험 생활을 한 끝에 드디어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동안 본 모습 중 가장 여유 넘치는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고향에 올 땐 늘 쫓기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합격해서 오니 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고 했다. 물론 시험 합격은 시작일 뿐이고 곧 일을 시작하면 사회의 쓴맛을 볼 테지만, 합격의 순간은 언제나 달콤하지 않은가. 맘껏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동창들과 연락이 많이 끊긴 나와 달리 그는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고,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창들의 근황을 내게 전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연락을 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편에서 종종 내게 안부를 물어와 준 덕분이었다. 시험에서 연이은 고배를 마시면서 자신의 소식을 알리고 주변을 살뜰히 챙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우리 추억이 되게 소중하거든. 지금 내 상황이 힘들어도 그 때 재밌었던 일들 생각하면 힘이 나니까. 그래서 그 때 친구들과 연락을 이어나가는 게 날 지탱해줬던 것 같다.”
긍정적인 기억들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해준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친구에게서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소하고 짧은 찰나더라도 행복했던 기억을 많이 모아둔 사람은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는 근육이 생긴다. 힘든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유머를 만들어 내는 힘은 지난 날 차곡차곡 모아둔 추억에서 나온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깨달았다. 험한 길 위에서 무릎이 꺾여도 웃으며 일어나 끝내 목적지에 깃발을 꽂은 친구가 멋져 보였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았던 지난해, 아이들은 한 해를 마치며 이번 학년에선 추억할 게 별로 없다며 아쉬워했다. 사람마다 위기의 순간에 조금씩 긴급 출금이 가능한 기억의 적금 통장이 있다면 어린이들은 지금 한창 추가 납입을 해두어야 할 시기일 것이다. 각자 가정에서 행복한 순간을 맞았던 어린이들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 환경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 부분을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채워주어야 하는데 지난해에는 그러지 못했다.
전면등교를 선포한 2학기가 막 시작되었다. 여전히 마스크는 쓰고 있지만 지난해 이맘때보단 훨씬 더 교실에 생기가 돈다. 어린이들이 자라서 어려움이 다가올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번 학기는 행복한 기억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이민정 온남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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