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금칼럼]“입장이 없다”

2021-09-14     경상일보

국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당이 사회적 영향이 큰 법률들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고 있다.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하는 법, 사학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법이 의료계와 사학단체들의 반대 속에 통과되었다. 언론의 취재활동을 제한하는 ‘언론중재법’은 거의 모든 언론관련 단체들의 반대 속에 겨우 재논의에 들어간 상황이지만 기필코 관철하겠다는 여당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률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여당의 일방적인 ‘입법 폭주’를 우려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와대의 태도이다. 이들 이슈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한결 같다. ‘입장이 없다’는 것이다.

‘입장이 없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고육지책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내심 묵시적 동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당이 압도적 다수인 국회에서의 결정은 곧 여당의 결정이므로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대통령의 책임성,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권력분립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에서 통과되는 법은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공포돼야 효력을 발휘한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에서 재논의를 해야 한다. 따라서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입장이 없다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되기 어렵다. 그래서 입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법안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논란에서 자신은 벗어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회적 논란과 갈등의 가장 권위 있는 조정자이자 종국적인 결정자가 누구인가. 바로 대통령 아닌가. 따라서 입장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논란을 해결해야 할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책무를 방기(放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은 대통령이 수반으로 있는 행정부에 의해서 집행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법률의 최고 집행책임자인 것이다. 자신이 책임지고 집행해야 할 법률의 내용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입장이 없다는 것은 아무 법률이나 국회에서 결정해 주면 그대로 집행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행정부의 입법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제약하여 ‘입법 폭주’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행정부 소속 관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소극적 대응을 부추겨 결국 국가역량의 훼손을 초래하고 있다.

대통령이 최고 책임자인인 행정부에는 전문성이 축적된 관료집단이 있다. 이들은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안의 문제점과 보완되어야 할 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전에는 관료들이 국회의 법안 결정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국회도 이를 반영하여 법안의 내용에 수정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자에는 행정부처의 의견을 구하지 않거나 무시하며 다수 여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법안이 늘어나고 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입장이 없다는데, 장관이나 관료들이 어떻게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해 행정부는 여당에 끌려 다니거나 여당의 주장을 합리화 하는 역할 밖에 못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는 졸속 법안들만 양산되고 있다.

청와대는 대통령 지지율이 40%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현 정부는 말년이 없다거나 레임덕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맞는 말이고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자이자 사회적 갈등의 최종적인 해결자인 대통령이 과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가? 대통령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최고 리더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사회과학자 사이먼(Herbert Simon)은 ‘리더는 마지막 말(last word)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리더는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입장이 없다’를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는 책임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