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가의 정원이야기(19)]사유의 정원
9호 태풍 ‘루핏’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대형 조각 ‘호박’이 바다에 빠져 파도에 휩쓸리는 뉴스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노란 호박은 나오시마 섬의 명물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다. 나오시마는 1998년 도시재생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예술, 산업이 조화를 이룬 섬으로 거듭났다.
이우환미술관이 개관한 이후 다시 나오시마를 찾았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예술적 체험을 했다.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립감과 육중한 벽에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 점으로 놓인 바위 하나에 비치는 영상을 보는 순간, 일상에 치여 돌보지 못했던 감정이 일시에 정화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지난달 방문하게 된 사유원에서 그때의 감흥이 떠올랐다. 군위군 부계면에 32만여㎡의 규모로 한 기업가의 철학을 담아 당대 조경과 건축의 대가들이 15년째 다듬고 있는 명상 숲이다. 방문하던 날 마침 비가 내렸다. 비 오는 숲길, 안인 듯 밖인 듯 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건축물, 빛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해져 숲과 정원은 생경한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리기다소나무숲을 걸어 들어가면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 소요헌에 다다른다. 6·25 전쟁의 상처를 보듬는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쟁과 파괴를 상징하는 코르텐 구조물이 뚫려있는 천장에서 비가 내리니 그 의미가 더 강하게 와닿았다.
수목원은 자연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모과나무에 얽힌 사연이 담긴 풍설기천년, 한옥 사야정. 사유원의 모든 공간은 담고 더해가는 게 아니라 빼고 가볍게 해서 다시 세상에 나가도록 설계된 곳이다. 도시를 벗어나 마주하는 고요함 속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정원이다.
정홍가 (주)쌈지조경소장·울산조경협회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