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머물다
그림책 <머물다>(루이스 트론헤임 글, 위베르 슈비야르 그림)가 속에서 가랑잎처럼 몇 날 며칠을 나뒹굴고 다닌다.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읽었던 책이다. 너무나 황당한 사건을 겪게 만든 이야기의 흐름에 낚여 그 책에 머물렀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책값 계산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있어’였는데, 차차 ‘맞아, 우리 삶이 그렇지’ ‘주인공이 나라면 남은 날들을 어떻게 지냈을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로 옮아갔다.
세상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고를 겪게 설정한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뒤통수를 맞는 듯했다. 약혼자를 잃은 파비엔느를 따라가 본다. 약혼자 롤랭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꼼꼼하게 계획하고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두었다. 파비엔느는 수첩에 메모해 둔 약속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고통에 사로잡혀 지내는 대신 약속에 충실히 머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함께인 것처럼. 충분히 롤랑의 약속에 충분히 머물다 가벼이 떠난다. 롤랑의 메모장과 여행 가방은 그곳에 두고서. 이 장면도 놀랍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죽음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희귀한 죽음 기사를 모으며 사는 원주민 다코를 만나게 설정한 작가의 구성도 매력적이다. 다코는 세상에서 유명한 여행지 곳곳의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여행을 가 본 적 없는 인물이다. 우연히 사건을 알게 된 다코는 진심으로 파비엔느를 위로해 주고 싶어 하지만, 파비엔느는 자신을 불행에 묶어두지 않는다. 그래서 멋지다. 우연에서 시작한 두 사람이 나중에 일부러 만난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 몇 마디가 마음에 남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결코 가늠할 수 없지요.’ ‘우린 모두 누군가의 관광객일 뿐.’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통해 성장하죠.’ ‘나도 당신의 성장에 도움이 됐나요?’
사흘 쉬고 학교로 돌아온 오늘, 마중 시간에 한 아이와 주고받은 말이다. ‘아, 집에 가고 싶어요.’ ‘오자마자 집에 가고 싶구나.’ ‘네 사흘 동안 게임만 했어요.’ ‘지금도 눈앞에 게임 화면이 막 보이겠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다니!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빠져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내뱉는 감탄사다. 그 순간 깨닫는다. 영원한 것 같은 시간은 실은 흐르고 있고, 그 속에 잠시 잠깐 머문다는 것을. 어디에 머무는가가 서로 다른 삶의 무늬를 만든다는 것을.
어제 보니 통도사 서운암 뒷동산에 금목서가 지고 있고. 곧 은목서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울 것이다. 잠시 잠깐이라도 머무는 동안 활짝 피어 향이 가득하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 학교에 머무는 동안 그랬으면 좋겠다.
신미옥 울산고운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