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 불상 속 복장 유물 370년 만에 공개
■임란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흥사 창·재건 시기’ 논란 속 해결 실마리
올해 초에 지정된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39호 중 하나로
송수환 박사 “임란 때 없었고 재건 시기가 창건 시기” 주장
이명훈 교수 “신라때 창건 임란중 소실…50년 후 재건 확인”
석운스님 “내년 완벽한 국역본 나와…기초자료로 활용되길”
울산시 북구 동대산 신흥사 불상 속에 들어있던 복장 유물이 37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신흥사의 창건 및 재건 연대를 두고 울산지역사 연구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으로 논란을 빚은 가운데 문제해결에 실마리가 돼 줄 전망이다. ‘순치6년(1649) 12월18일 신흥사가 불상을 새로 조성하며 기록한다’는 제목의 기문은 올해 초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물 일괄’(신흥사 소장) 중 하나다.
도입부 신흥사 위치에 대한 내용에 따르면 ‘동쪽 좌우로는 하만(河灣)이 부채 모양으로 펼쳐졌고, 뒤의 높은 곳에는 석성이 자리 잡았으니, 그 절은 명랑(明朗)의 도량으로 알려졌다’고 돼 있다.
이어 ‘처음 임진년에 난을 일으킨 왜적들이 절을 태워 없애니 이제 그 터는 우거진 숲으로 화했다. 일찍이 우리 도의 병마절도사가 을유년(1645) 초에 승 4~5명을 모아들여 일을 주관하게 하니, 이들이 좌우동서로 두루 돌아다니며 각 절에 나아가 기와 및 목재를 구비하도록 명령을 집행함으로써 동서 상실(上室)과 좌우 전사(殿舍)를 건성(建成)했으나, 미처 법당은 짓지 못했다. 때마침 축언이라는 자가 있어 무자년(1648) 초에 시주를 인도하고 권장하여 기축년(1649) 가을에 법당 건물을 지었으나, 불상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고 한다.
기문에는 불상을 만들어 운반하는 경위도 서술하고 있다. ‘그 절의 노승 계영이라는 자가 시주를 인도하고 권장함으로써 원원사 불상 3존을 조성하고 다음에 신흥사 불상 아미타불 1존을 조성했는데, 조성한 곳은 북쪽 삼백리 오천(烏川) 질곡(叱谷)이었다. 그 땅은 본래 ‘흙으로 된 부처의 몸’이라 칭해질 정도로 특별히 상서롭다고 일컫던 곳이다. 그곳에서 만든 불상 1존을, 물이 바다 어귀에 차오르니, 배에 싣고 노를 저어 옴으로써 절에 들여왔다’고 돼 있다. 마지막은 시주 명단으로 마무리 된다. 우선 담화비구, 조언 부부, 박도비구가 올라있다. 소임 명단에는 예불(삼학비구), 화원(영이비구, 수환비구, 승일비구, 천백비구, 일륵비구), 기획(승명비구, 축존비구), 근화 기타(계영비구), 그리고 특정 소임이 없는 승려의 명단에는 홍률, 덕종, 영각, 인감, 회원, 혜종이 기록됐다.
이번 기문 공개는 최근 임란 호국사찰로 알려져 온 신흥사가 정작 임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기문에 기술된 재건 시기가 곧 창건 시기라는 송수환 박사의 추론(본보 9월16일자 18면 기고)에서 출발했다. 송 박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호국사찰로서의 신흥사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흥사 의승대장 지운(智雲)을 열여섯 의병장의 일원으로 기리는 기박산성 임란의병사 마저 부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논란에 대해 연구를 해 오던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규명이 절실한 상황에서 신흥사 기문을 어렵게 접했으나 아직 국역 전이었다. 여러 전문가에게 자문해 부족하나마 국역에 이르렀고, 신라시대 창건 이후 임란에 불탄 뒤 약 50년이 지난 1645~49년 재건되었다는 신흥사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신흥사 재건의 주역이 이번 기문 번역으로 명확해 진 것도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간 신흥사 재건에 축화, 혜종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기문 확인 결과 축화는 찾아볼 수 없고 혜종은 특정 소임이 없는 승려로만 올라있다. 이 교수는 “상실 및 전사를 세운 병마절도사 이급, 법당 건성을 주도한 축언, 불상 조성을 주도한 계영비구가 신흥사 재건을 주도한 것으로 새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다만, 신흥사 주지 석운 스님은 “아직은 기문이 완전하게 국역되기 전이다. 연구용역을 거쳐 내년에는 좀더 완벽한 국역본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국역은 이에 앞선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