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자연과 기술이 공존하는 미래도시 울산
19세기, 산업혁명시대의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노동력의 해방과 함께 기술 만능의 ‘메케니컬 파리다이스’란 허상을 안겨주었다. 인간은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인공의 메갈로폴리스들은 지구 위를 뒤덮는다.
19세기,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인 국제대회에서 한 과학자는 선언한다. “우리가 과학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다만 지금 못 풀 뿐이다.” 이 무시무시한 선언은 과학으로 우주만물의 본질을 밝혀 낼 수 있고 나아가 신의 경지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인간의 환상적 맹신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과학발전으로 다시금 허물어진다. 결정론적 입장의 고전역학 시대가 지나 상대성역학, 양자역학에 다다르면 확률적 불확정성의 게임이 우주만물을 지배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자연을 능가하는 힘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거의 정복된 것으로 여겨졌던 자연은 다시금 그 무한의 힘으로 우리의 허황된 욕망을 무시해버리고 있다.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이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지구는 한낱 무한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이고 인간은 그 먼지에 위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시작된 서구 근대화는 제국주의를 낳았고 지역, 국가, 문화 간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이는 타 국가를 식민화시키는 자위적 명분을 만들어냈고 과학(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등)은 이러한 위계를 증명하는 수단이자 도구였다. 자연 또한 이런 이항대립의 관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즉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는 기술과 자연을 대립적 관계로 만들었고 자연은 개척과 정복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제 또 다른 기술혁명의 디지털시대에 서 있다. 네덜란드 지질학자 파울 크뤼첸은 동시대를 ‘인류세’라 지칭했다. 이는 신생대, 중생대와 같이 새로운 지질시대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인류의 자연 파괴로 지구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되어버린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제야 인간은 스스로 자연 앞에 미약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탄소중립, 순환경제, 자연에너지 등 인공기술과 자연환경 간의 공존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사적 갈림길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합리적 이성이 아닌 직관적 감성을 다루는 예술은 정치 경제와는 다른 의미와 역할로 우리 사회의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공공적 힘은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는 이미, 변화를 창조하는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역사로부터 경험했다. 예술은 위대했고 위대하고 위대할 것이다. 모 사회학자는 “중세시대는 종교가 우리의 삶을 지배했고, 20세기는 이념이 우리 삶을 지배했고, 21세기는 예술과 문화가 우리 삶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울산은 기술과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근대 산업기술의 역사적 단층들이 쌓여 있는 곳이며, 고봉의 산들과 기암의 해변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아마도 이러한 양가적 환경의 정체성을 가진 도시는 한반도에서 울산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환경에서 울산은 끊임없이 기술과 자연 간의 공존을 모색해왔고 그에 따른 성과도 있었다. 태화강은 살아났고 공기는 맑아졌다. 무공해 산업기술, 친환경 발전, 수소경제 등 다양한 실험들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울산시립미술관이 개관했다. 이제 울산의 자연생태와 산업기술의 공존을 위해 예술이 나설 차례이다. 미술관은 지역과 연계해 하나의 환경적 생태계를 이루고 자연과 기술 간 상호공존의 미래도시를 위해 더욱 다양한 예술 활동들을 실행할 것이다. 문화도시 울산은 인간, 자연, 기술 간의 공존에서 나아가 융합의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예술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울산은 미래의 새로운 이상사회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선도적 도시로 세계 속에 자리매김할 것이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