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제의 독서공방]슬픔을 덮는 슬픔, 밝음

2022-03-21     경상일보

세상이 침울하다. 팬데믹으로, 전쟁으로, 자연재해로, 아수라장이 된 것 같다. 끈질긴 밤의 시대 같다. 어둠 속에 있으면 크고 작은 문제들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때도 많다. 그렇게 곪아가는 상처를 시시때때 다루며 산다고 해도 전염성 짙은 슬픔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문학동네)은 깊은 슬픔이 서려있는 어둠 속에서 ‘밝은 밤’을 기꺼이 찾아내어 독자에게 넘겨준다.

주인공 ‘나’(지연)는 결혼에 실패하고 ‘희령’이라는 마을로 정신적 도피를 한다. 거기서 이십 년 만에 만난 할머니를 통해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지난한 삶을 살아오던 중 천주교도인 ‘새비’를 만난다. 새비 부부를 통한 이웃사랑을 알게 되고, 깊은 우정을 새기며 삶을 살아낸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속임을 당해 아내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결국 파국을 맞는다. 하나뿐인 딸의 호적을 분명하게 할 수 없었던 여성의 무력함은 딸과의 사이까지 소원해지게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새비의 딸 희자와의 따뜻한 관계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엄마 또한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과 결혼 후 겪는 아픔으로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른 채 살아간다. 엄마의 사랑이 목마른 ‘나’,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엄마와 불화를 겪는다.

4대에 걸친 여성들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개체이면서도 가족 공동체로 묶인 한 존재가 각 시대와 세대가 겪은 역사와 시련의 슬픔을 헤아리는 내용이다. 또 가부장제도에 갇혀있는 여성들의 모습도 그려준다. 작가는 그 어둠 속에서 우정과 사랑과 배려의 빛을 찾아낸다. 그 빛으로 선조들이 살아내고 또 살아졌음을 깨닫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성되는 따스한 빛이 ‘밝은 밤’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이 시대적 아픔과 슬픔도 지금 우리를 통하여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이 깊은 밤의 시간에 우리를 뭉클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밝은 밤’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가. 우리 다음세대와 또 다음다음세대들이 지금의 역사를 더듬어볼 때 ‘밝은 밤’ 한 조각을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설성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