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박정희정권의 ‘인혁당사건’에 울산 청년 2명도 인권 짓밟혀

2022-04-04     홍영진 기자

지난 3월2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시 달성군 사저로 돌아와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할 때 이모(47)씨가 소주병을 던져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모씨는 경찰 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인혁당 사법 살인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아 병을 던졌다”고 밝혔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인민혁명당 사건(이하 인혁당 사건)’이란 무엇일까.

역사서는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활용해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사건’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는데 수사가 공정하지 못했고 재판 역시 편파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더욱이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한 다음 날 관련자 8명을 바로 사형시켜 유족들은 물론 사회단체의 분노를 샀다. 아무튼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인혁당 사건에 울산 출신 젊은이 두 명이 연루되어 한 명은 주모자로 몰려 사형당하고 다른 한 명은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울산사람이 많지 않다.

이 사건에서 주모자로 몰려 처형당한 인물이 언양 출신의 우홍선이다. 1930년 3월6일 언양에서 태어났던 우씨는 언양초중을 졸업한 후 고교 과정인 전수과에 진학해 일 년 더 공부했다. 그러나 이때 마침 언양농고가 세워지면서 전수과가 폐지되는 바람에 공부를 더하기 위해 서울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언양 사람들이 우씨를 다시 본 것은 그가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언양에 나타났을 때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육군 장교가 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언양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그의 초중 동창까지도 우홍선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초중 시절 ‘홍선(洪善)’ 대신 ‘동읍(東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실제로 그가 인혁당 사건으로 중정에 체포된 후 처음 신문에 이름이 보도되었을 때도 ‘동읍’으로 기술되어 있다.

초중등 시절 그는 공부를 잘했다. 그의 중고교 동창인 신동익(92·삼남면 가천리)씨는 “초중등 시절 동읍은 수재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해 교사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그의 언양 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형이 둘 있었는데 맏형 병기는 언양 파출소 사거리 인근에서 장롱을 짜는 큰 목재소를 운영했고 두번째 형 동조는 삼남면 상천리에서 살았는데 집 인근에 큰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

부모도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없고 단지 어머니 이기옥씨가 홍선과 함께 맏형 병기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씨는 언양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양 사람들의 기대주였다. 당시 언양 사람들은 우씨를 포함, 김무용과 김영광을 ‘언양 삼총사’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앞으로 언양을 빛낼 인물로 보았다.

삼총사 중 김무용은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김수선의 동생이었는데 그는 언양초등학교 28회로 나중에 육군 대령으로 육군본부 통신참모를 역임했다.

그러나 무용을 제외한 홍선과 영광은 서울까지 유학을 갔으나 젊은 시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면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1974년 3월 중앙정보부는 ‘정부 전복 후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회합을 가졌던 일당을 내란예비음모 등 긴급조치위반으로 일망타진했다’고 밝혔는데 이 속에 우홍선과 김영광의 이름이 들어 있다.

중정 발표에 따르면 김씨는 1962년 우홍선이 서울 부암동 자신의 집에서 인민혁명당을 창건할 때 참가 동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씨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김수선 국회의원의 비서로 활동했다. 중정발표를 보면 체포당시 그는 전국학생지도부 교양책으로 원륭건설회사 서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후 김 씨는 한동안 언양 남부리 고모집으로 와 숨어 살았지만 나중에 자수했다.

김씨는 1965년 1월 1심 재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런데 1965년 5월 고법에서는 1년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바람에 법정 구속이 되었다.

이후 출소했던 그는 덕수궁 앞에 파나마 여행사를 차려 놓고 여행업을 했는데 이때 언양 사람들이 서울에 가면 이 여행사를 들르곤 했다.

김씨에 비하면 홍선은 재판 과정이 길었고 고문도 많이 당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 우홍선의 죄명이 언론에 구체적으로 보도된 때가 1975년 5월27일 중정이 공소사실을 발표하면서다.

이날 발표된 우씨의 공소 요지를 보면 1966년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후 1974년 3월 정부 전복 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회합을 가진 것이 드러나 내란 예비 음모 등 긴급조치 위반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중정은 우씨가 1962년 1월 당시 부암동 자신의 집에서 북에서 내려 온 간첩 김영춘 사회로 인민혁명당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씨는 1964년까지 체포되지 않아 1964년 9월2일자 동아일보는 우씨가 인민혁명 사건과 관련 지명수배와 함께 1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이때 그의 신분은 예비역 육군 대위로 되어 있다.

남편이 연행된 후 재판을 받는 동안 부인 강순희 여사는 남편 구명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74년 8월에는 명동 YWCA 강당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양심수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이때 기자들이 취재를 하기 위해 모여들자 강여사는 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사람이 죽게 되어도 우리 사정은 한 줄도 싣지 않는 너희들이 무슨 기자냐”면서 고함을 질렀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은 중정이 보도를 강력히 통제하는 바람에 기자들이 기사를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1975년 1월에는 남편을 비롯해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죄가 없다는 호소문이 담긴 팸플릿을 길에서 돌리는 등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가족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9일 사형을 구형했고 이틀 뒤인 11일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군검찰과 재판부가 이처럼 재판을 서두른 것은 이례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의 공정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1975년 2월에는 정부가 민심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대거 석방하지만 우씨는 제외되었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우리 아빠가 제외되다니 어린 4남매 등 울음바다’라는 제목으로 ‘인혁당 사건과 관련 우씨의 노모 이기종(69)과 장녀 단아양(18) 등 1남3녀가 우씨가 석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보도를 했다.

이후 대법원 재판도 속결로 이루어졌다. 대법원이 우씨를 포함해 8명의 관련자에게 사형을 확정한 때가 1975년 4월8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뒤인 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신동익씨는 “동읍이 사형된 후에도 우리 동기들은 자주 모여 동읍의 얘기를 했지만 동읍이 간첩 활동으로 죽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그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아쉬워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숨을 거두었던 우씨가 명예회복을 한 것은 그가 죽은 후 30여 년이 훨씬 지난 2007년 1월이었다. 이때 정부는 우씨를 비롯한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당했던 8명의 피고들이 재판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했고 군검찰의 짜맞추기 수사로 인권이 침해를 받았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우씨가 언양을 떠난 후 언양도 많이 바뀌어 우씨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가 다녔을 때만 해도 언양초등학교는 언양읍성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멀리 송대마을로 이전했다. 또 그의 형이 장롱을 짰던 자리에도 그가 어릴 때만 해도 인근에 일본식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인걸도 자취를 감추어 김무용과 김영광 등 삼총사들은 언양을 떠난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인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던 우씨 가족의 흔적 역시 더이상 언양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