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희곡]옷장 속 남자 - 김미령

2020-01-01     경상일보

◆등 장 인 물
김 : 26세 여성. 콜센터 직원
노인 : 나이 불명. 고집이 센 인물
주인 : 중년 여성 / 이웃 1, 2 / 고객(목소리)
◆때 현대, 장마철
◆장 소반 지하 원룸
◆무 대
반 지하 원룸. 김의 방과 부엌 사이에 문 있고 부엌 옆에 출입문 있다. 김의 방 벽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구멍이 있고 그 앞은 옷장이다.


무대 밝아지고 장대비 소리가 들린다. 이 집의 창문은 천장에 반쯤 걸려있는 듯하다. 빗물이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부엌에 서있는 김은 식탁을 닦다가 천장 앞에 가서 선다.발을 동동 구르는 김.



김=아씨…. 또 시작이야.

바가지를 들고 와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에 놓는다.

김=다른 곳보다 10만 원이나 싸서 왔는데. 반지하가 이래서 안 좋다는 거구나.

투덜거리듯 내뱉는 김. 벨소리가 울리고 전화를 받는다.

김=아. 예. 아줌마. 어…. 월급이 아마 내일 모레 쯤 들어올 것 같은데요. 돈 들어오면 바로 드릴게요. 네…. 월세 자꾸 밀려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제 때 낼게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며) 에휴. 이놈의 돈….

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탁 위를 다시 닦는다. 오른편에 놓인 사과 한 개를 본다.

김=(사과 하나를 들어올리며) 어. 이상하다. 분명 두 개였는데….

사과 한 입을 베어 문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때 방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김=(놀라며) …? 뭐지? (천천히 방으로 다가가며) 거기 누구 있어요?

또 한 번 쿵. 방문 앞에 서 있던 김은 놀라 뒷걸음친다. 다시 정적. 김은 천천히 옷장 앞으로 다가간다.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를 들여다본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고개를 뒤로 뺀다. 그대로 뒷걸음쳐 방 안을 나온다.

김=(떨리는 목소리로) 저기요. (사이)

김=거기 누구 있어요?(사이)

김=(숨을 한 번 고르고) 사람이라면 대답해줘요. 없던 일로 해줄 테니까…!(사이)

방 안을 기웃거리는 김. 빗줄기 소리는 점점 거세진다.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린다. 김은 스피커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누른다. 클래식 음악이 켜진다. 소리를 키운다.

김=(중얼거리며) 귀신일까? 아닐 거야…. 주인아줌마한테 얘기해볼까? 도저히 이런 곳에서는 못 살겠는데…. (생각이 바뀐 듯) 아니야.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일지도 몰라. 아직 계약도 한참 남았고. 어떻게 구한 방인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 귀신에 홀려 죽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직접 죽였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어. 그래. (결심한 듯) 일단 가만히 있어보자.

조명이 꺼지고 빗소리가 잦아든다. 불이 다시 켜지고 부엌 식탁에 앉아있는 김. 노트북을 열고 마이크가 장착된 헤드셋을 끼고 있다.

김=(웃으며)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아니. 어제 주문을 했는데 왜 안 오는거여?

김=유감입니다. 고객님. 배송에 문제를 겪고 계시군요. 제가 조회해드리겠습니다.

고객=(말을 끊으며) 유감이고 자시고 빨리 해줘.

김=고객님 죄송하지만, 주문하신 제품은 출고일 기준 약 2일 정도 소요되실 걸로 예상하고요. 당일 출고 되는 제품이라도 적어도 이틀은 기다리셔야 해요.

고객=아니. 누가 몰라? 아는데 빨리 좀 달란 말 아니여?

김=아 네. 고객님. 기대에 맞추려 노력하겠습니다.

고객=이봐. 몇 살이야?

김=(당황한 듯이) 네?

고객=아니…. 이상하게 방금 말투가 좀 그랬단 말이지….

김=…불편하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고객=(찝찝한 듯이) 빨리 보내기나 혀.

김=네. 고객님. 출고 되는대로 신속히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휴…. (시계를 보며) 벌써 시간이 다 됐네.

노트북을 닫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간다. 문 앞에 중년 여성 두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김은 둘을 본다.

이웃 1=어머. 그랬단 말이야? 세상에. 무서워서 어찌 살아.

이웃 2=그렇다니까! 내가 그 할배 얼굴을 봤는데…. (김을 발견한 듯 눈치를 보며) 속닥속닥….

이웃 1=아니. 집에서 실종되면 어떻게 찾는 거야?

이웃 2=쉿…!

이웃 1=(김을 발견한 듯이) 아. (애써 웃으며) 학생. 이 집 살아?

김=(상황을 파악한 듯이) 네.

이웃 1= 맞다. 빨래 돌리는 걸 까먹었네.

급한 듯 자리를 뜨는 이웃 1, 2. 그 모습을 보던 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의 집엔 노인이 서 있다.

김=(놀라며) 누구세요?

노인=(냉장고 문을 연다)….

김=저기요!

노인=(김을 보며) 응?

김=누구신데 여기 있어요?

노인=(무심하게 다시 냉장고로 시선을 돌린다)

김=저기요. 제 말 안 들리시냐고요.

노인 아무 말 안하자, 김은 앞으로 다가가 냉장고 문을 잡은 노인 손을 낚아챈다.

노인=뭐야?

김=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오세요?

노인=여기가 자네 집이라고?

김=(어이없다는 듯) 당연하죠.

노인=여기 우리 집인데?

김=네?

김. 헛웃음 친다. 잠시 식탁을 쳐다본다.

김=(식탁 위 사과를 가리키며) 설마 저기 있던 사과. 할아버지가 드셨어요?

노인=(헛기침을 한다) 흠….

김=(노인을 밀어내며) 나가세요. 당장 안 나가면 신고할 거예요.

노인=(일어서며) 젊은 친구가 보자보자 하니까…. 여기 우리 집이야.

김=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노인=진짜라니까?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를 꺼낸다) 여기.

김=(종이를 받아들며) 뭐야…. 집문서? 설마.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할아버지. (종이를 흔들며) 이거 작년까지잖아요.

노인=(딴청 피우며) 음….

김=이전에 살던 분이신 거죠? 죄송한데 지금은 저희 집이예요.

노인=그려. 근데 우리 집인 것도 맞지.

김=할아버지.

노인=그냥 여기 살면 안 돼? 사과 먹은 건 미안하고. 나 꼼짝도 안하고 있을게…! 자네 잘 때는 조용히 하고, 음식은 나 알아서 해먹고…

김=억지 부리지 마세요.

노인=….

김=….

노인=그냥 살게 해줘.

김=안된다니까요.

노인=젊은 처녀가 왜 이리 속이 좁아?

김=그게 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노인=한 일주일만….

김=안 돼요.

노인=그럼 5일 만….

김=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노인=3일?

김=안 돼요.

노인=치….

전화벨 소리

김=(전화를 받으며) 아. 네. 네. 팀장님. 네. 아…. 지금요? 네. 아. 아무 일 없어요. 가능해요. 네. 지금 들어갈게요. (전화를 끊고 노인을 바라본다) 저기요. 저 일 해야 되니까 조용히 해야 돼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김은 식탁 앞에 앉아 헤드셋을 낀다. 노인, 부엌에서 움직인다. 김의 뒤로 몰래 찬장을 열고 과자를 꺼낸다.

노인=(부스럭)

김=(노인을 쳐다보며)?

노인=하던 일 혀.

김=(한숨을 내쉬며) 하…. 아. 네. 고객님. 네. 네.

김, 노트북을 닫는다. 옆에 놓인 세금 고지서를 들춘다. 언제 다 내지. 중얼거린다. 노인은 부엌 안쪽에 쭈그려 앉아있다.

노인=(노트북을 가리키며) 그거, 뭐하는 일인가?

김=고객 상담이요.

노인=돈 많이 주나?

김=그냥 그래요. 재택근무예요.

노인=재택근무?

김=집에서 하는 일이요

노인=왜 답답허게 집에서 일해? 나가서 바깥 공기도 좀 쐬고 사람들도 만나여지.

김=저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노인=어째서? 젊은이가 그러기 쉽지 않은데….

김=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노인=크흠….

김=왜 그러세요?

노인=궁금해서.

김=굳이 말해야하나요?

노인=그건 아니고. (생각 하다가) 자넨 남자친구 없나? 그 나이 땐 남자친구랑 데이트도 해야지. 뭐. 그래. 놀이 동산인가? 그런 곳 가서 놀아보기도 하고.

김=죽었어요.

노인=흠….

김=물어보지 마세요.

노인=유감이군.

잠시 정적. 빗소리가 커진다. 김은 창문을 본다.

김=오늘은 비가 이렇게 내리니 재워드릴게요. 대신 내일 아침엔 나가셔야해요. 안 그 럼 돈 받을 거예요.

노인=이봐. 난 돈을 벌수가 없어.

김=버시면 되잖아요.

노인=무슨 수로?

김=서울역 한번 가보세요. 앉아만 있어도 돈 벌 거예요. 거기 유동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요. 돈 많이 버실 거예요. 노숙자들은 대낮부터 술판 벌이던데요. 다들 코가 시뻘개요. 거기서 친구도 사귀고 외롭진 않겠네요. 일석이조 아니에요?

노인=너무 덥고 찝찝해. 겨울엔 추워서 어찌 살아.

김=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노인=….

김=어쩔 수 없죠.

노인=돈이 없으면…

김=못 살죠.

잠시 정적.

김=엘에이 어떠세요?

노인=에레이?

김=미국이요.

노인=들어본 것 같기두 하고….

김=거긴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20도래요. 얼어 죽을 일도 없겠네요. 그리고 뭐더라…. 법이 바뀌어서 제재도 없다던데요?

노인=난 한 번도 비행기 타본 적 없어.

김=돈 모아서 타세요.

노인=그…. 여…. 뭐 시기 여권이라든가…. 아무튼 그것도 없고….

김=만들면 되잖아요.

노인=복잡혀. 어디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리고 거긴 약쟁이들 밖에 없을 거 같애. 차라리 서울역에 가고 말지.

김=그럼 가세요.

노인=(말 돌리며) 음…. 이 종이는 뭔가?

김=건들지 마세요. 세금 고지서예요.

노인=(종이를 들여다보며) 이거라도 내줄까?

김=무슨 수로요? (방 앞으로 걸어가며) 저 피곤하니까 잘 거예요. 절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마세요.

김, 방문을 닫는다. 노인은 그 앞을 서성이다 부엌으로 온다.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다, 다시 일어서 찬장을 연다. 통조림 두 개를 챙겨 하나는 옷 안에 집어넣고 하나는 따서 먹는다. 불이 꺼진다.

불이 켜지고, 노인은 부엌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김은 잠에서 깨고, 전화를 받는다.

주인=학생. 월세 아직 멀었어?

김=아 네…. (잠시 생각하고) 오후 중으로 낼게요. 네. 네. 죄송해요. 자꾸 밀려서… (전화를 끊고 다시 어딘가로 전화한다) 어. 엄마…. 나 저기…. 돈이…. 좀 부족해서…. 어…. 엄마 힘든 거 아는데…. 이번 달은 돈 못 보낼 거 같아…. 응…. 아빠는 좀 괜찮아? 미안해….

김은 한숨을 쉰 후 방문을 열고 나온다.

김=(노인을 발견하며) 이봐요!

노인=으음…?

김=왜 안 나가고 아직도 있어요? (식탁 위 다 먹은 통조림 캔을 발견한다) 이건 또 뭐야.

노인=흠.

김=(노인을 밀어내며) 당장 나가세요.

노인=돈이 부족한가?

김=무슨 상관이세요.

노인=아니 방금 전화하는 거 좀 들었는데….

김=할아버지는 참견하지 마세요.

노인=내가 도와줄게.

김=(택도 없는 소리라는 듯) 허!

노인=(김 앞에 서며) 낮엔 내가 돈을 벌게. 대신 잠만 재워줘.

김=월세 절반 내시게요?

노인=그건 좀….

김=돈 어떻게 버시게요?

노인=나 같은 늙은이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어와.

김=그럼 처음부터 엘에이 가서 사시라니까요?

노인=(화를 내며) 아니…. 그냥 살게 해달라는 건데 왜 이리 차갑게 굴어? 그게 그렇게 어려워?

김=네.

노인=쳇….

김, 통조림을 버리고 싱크대에서 밀린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 노인. 그 모습 지켜보다 김을 툭툭 친다.

김=?

노인=내가 자네 신고할 거야.

김=네?

노인=우리 집인데 자꾸 나가라고 하잖아.

김=(웃으며) 할아버지. 뭔가 단단히 잘못 아시는 거 같은데. 여긴 저희 집이예요.

노인=누가 몰라? 근데 우리 집인 것도 맞지.

김=집이였었!던 거잖아요. 지금 우리 집인 거랑, 집이였었던 거랑 어떻게 같아요?

노인=몰라. 그냥 우리 집이야.

뚝뚝.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김=아…. 또 저러네. (수건을 가지고 와서 놓는다)

노인=내가 살았을 땐 안 그랬는데…. 쯧

김=비가 많이 오나보죠. 반 지하는 원래 이러던 걸요.

노인=왜 굳이 여기 왔나?

김=(당연한 듯이) 저렴하니까요. 서울 집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보증금도 천은 기본, 살만한데 찾으려면 오십은 돼야 해요. 한 달 오십 만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고요. 한 달 월급 받으면 월세로 다 나가요.

노인=그 뭐더라…. 고…. 고시. 거긴 어떤가?

김=고시원이요?

노인=그래. 그거.

김=고시원 살아봤어요. 스무 살 때요. 대학 입시 망치고 노량진에서 공부해보겠다고 용기 좋게 혼자 산 적 있었죠.

노인=거기는 어떤가? 더 말해주게.

김=거긴 살만한 곳이 아니에요. 두 다리를 뻗으면 공간이 끝인데요.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거예요. 어느 날엔 누워있는 제 모습이 마치 시체 같았어요.

노인=나 젊을 때는 그런 곳에서 잘만 살았어.

김=할아버지 때랑 저희는 다르죠.

노인=그 뭐더라…. 나 탑골 공원서 지냈을 때. 그쪽에서 불이 났었어. 거기두 고시원이라던가…. 7명이 죽었다든데.

김=아. 저도 알아요. 안타깝더라고요. 누구지. 어떤 청년은 창문이 없어서 대피하지 못했다던데요. 안타까웠어요.

노인=자네도 창문 없는 방에 살았나?

김=처음엔 창문 없는 방이었어요. 40만 원짜리 방이었거든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막히고 눈이 맵더라고요. 환기가 안돼서 그런가? 그리고 빛이 안 들어오니까 시간 개념이 없었어요. 진짜 관 속에 갇힌 기분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5만원 더 내고 방을 옮겼어요.

노인=음. 5만원 더 내면 창문이 있나?

김=네.

노인=그 청년도 5만원만 더 있었더라면….

김=그러게요. (거센 빗소리를 듣고) 비가 계속 오네요. 여름인데 왜 이렇게 추워….

김은 보일러 앞에 간다. 버튼을 누르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다. 김은 반복해서 누른다. 켜지지 않자 작게 욕을 지껄인다. 이불 하나를 가져와 몸을 감싼다.

김=춥다.

노인=(김을 본다) ….

전화벨소리

김=어. 엄마…. 방금 말했잖아…. 나 돈 없다고. (한숨을 쉬고) 월세도 밀렸어. 아무래도 전기도 끊길 거 같아. 어. 알아…. 왜 화를 내? 엄마도 알잖아. 나 힘들게 사는 거. 아니. (잠시 화를 삭이는 듯) 아빠 아픈데 엄마가 한 게 뭐가 있어? 보험금 타서 아빠한테 안 쓰고 몰래 쓴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노인=….

김=알았어. 그만해. 화내서 미안해. 아빠 잘 지키고. 응. 다음에 전화해. 끊어. (전화를 끊는다)

김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던진다.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올린다. 김은 눈물을 닦는다. 노인은 슬금슬금 걸어와 김 옆에 선다.

노인=아버지가 아픈가?

김=신경 쓰지 마세요.

노인=무슨 병이라도 걸린가부지?

김=관심 끄세요.

노인=내 와이프도 병으로 죽었어.

김=(노인을 힐끔 본디)

노인=췌장암이라든가…. 말기였어.

김=…. 저희 아빠도예요.

노인=흠. 곧 죽겠구먼.

김=뭐라고요?

노인=별 수가 없겠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거여.

김=그런 저주할 거면 나가세요.

노인=아이. 진짜라니까?

김=(밀어내며) 오늘은 진짜 나가세요. 신고를 하든 말든 어차피 제가 이길 테니까.

노인=(회상하듯) 난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 없네. 내 아내를 떠나보낸 날을….

김=….

노인=(생각에 잠긴다)

김=죽었을 때 어땠어요?

노인=하하하….

김=하하하.

실소를 터뜨리는 김과 노인.

노인=아마 십 년 전이던가…. 아내를 보내고 나서는…. 집 밖에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네. 이 집엔 향이 이렇게 새록새록 묻어져있는데….

김=옛날이야기잖아요.

노인=(무시하며) 결혼을 했던 순간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네. 비록 신혼 집 하나 마련할 수 없었지만…. 집을 얻기 위해 둘이서 시장에서 열심히 물건을 팔고….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벌었네. 그렇게 어렵게 구했네….

김=(말없이 듣는다)

노인=췌장암…. 암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병일세. 어느 날 허리가 아프다며 병원에 데려다 달라 했는데. 가서 보니 이미 뼈까지 퍼져있었군. 이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나네…. 매일 바쁘고. 두렵고…. 아픈 사람을 옆에 두는 건 매일이 지옥이야….

김=(관심 없는 척) 엄마가 알아서 하겠죠. 저는 돈만 벌었어요.

노인=쯧…. 있을 때 잘혀.

김=(말 돌리며) 이 집에서 몇 년 사셨어요?

노인=십 년 정도?

김=반 지하에 오래 살면 안 좋지 않나요.

노인=(고개를 저으며) 잘 모르겠던데.

김=그래요?

노인=암, 같이 있는 자체가 행복했어. 같이 먹고 씻고 누울 곳이 있다는 게 어디일세. 비록 겨울엔 보일러가 안 돌아가 춥고, 비오는 날엔 축축했구…. 그래도 함께라서 좋았네.

김=돈이 정말 없으셨나보네요.

노인=(당연한 듯 끄덕이며) 그렇지.

김=돈이 뭘까요.

노인=…. 돈은 벌어두 아무 짝에도 소용 없어….

김=잘 모르겠네요.

노인=돈을 모은다는 게 제일 신기한 일일세.

김=그건 동의해요.

노인= ….

김=벌면 벌수록 어딘가로 빠져나가요. 전 분명 스무 살 때부터 나중엔 꼭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야망으로 살았거든요.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 같고요. 비록 스무 살 땐 재수 때문에 돈이 나갔다고 해도, 대학교 다니면서도 성실히 지낸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내 집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택도 없는 소리. 서울은 왜 이렇게 집값이 비싸요?

노인=집값이 오르니께.

김=그건 저도 알죠.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네요.

노인=너무하긴 하지.

김=…. 그리고 아빠가 아프니까….

노인=병원비가 말도 못해…. 내 아내도 그렇게 죽었네…. 뭐 이미 말기라 시한부였지만. 그래도 치료를 받았더라면 얼굴 조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김=…. 안 추우세요?

노인=난 별루…. 이 점퍼가 따뜻해. 저 지하도에서 주웠어.

김=냄새 안 나요?

노인=거기 사는 한 친구가 입던 거 같어.

김=…. 그 사람은 이 비오는 날 겉옷도 없이…. 안쓰럽네요.

노인=내 잘못 아니여.

김=누가 뭐래요.

노인=(말 돌리며) 자네 남자친구가 죽었다고 하지 않나?

김=네.

노인=한번 말해보세. 나도 아내 이야기를 했잖아. 자네 이야기가 궁금하네.

김=전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요.

노인=어차피 집에 있음 할 것도 없지 않나?

김=…. 그래요.

노인=(궁금한 듯 눈을 밝힌다)

김=어릴 때부터 가난했대요. 사람은 진짜 착하고 순했거든요…. 제가 슬퍼서 울고 있을 때면 꽃을 선물해주고, 온종일 걱정하고…. 지나 챙기지…. 자기 힘든 것도 모르고 제가 안쓰럽대요. 저는 걔가 안쓰러운데 말이죠. 서로 안쓰러워했어요. 웃기죠?

노인=좀 웃기네.

김=아래로 동생이 둘이었어요. 책임지고 살았거든요. 성인이 된 이후부턴 그게 너무 버거웠나 봐요. 힘들어하다 보니 저한테 대하는 것도 달라지더라고요,

노인=….

김=권태기였나 봐요. 함께 이겨냈어야 했는데. 서로 지쳐서 피하기만 했어요. (웃으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힘들어도 서로 풀 건 풀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헤어졌어요.

노인=몇 년 사귀었나?

김=4년이요. 고등학생 때 만났어요.

노인=오래 만났군….

김=그렇게 서로 다른 지역에 살기도 했고…. 각자 바쁜 삶을 살고 있었어요. 걔에 대해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어요. 처음엔 무소식이 희소식인가 했는데….

노인=….

김=헤어지고 처음 온 연락이 그거네요.

노인=안타깝군.

정적, 빗소리 들리고 김과 노인은 창문을 본다.

노인=올해 장마가 꽤 긴가봐….

김=….

노인=….

김=오늘 밤까지 만이예요. 앞으로 더는 안돼요.

노인=낼 모레 까지만 안 될까…?

김=안돼요. 그렇다고 가만히 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노인=정말로 낮에는 돈을 벌어올게…!

김=월세 나눠 내시면요.

노인=그건….

김=솔직히 월세를 나눠 낸다 해도 할아버지랑 제가 왜 같이 살아야 해요?

노인=그야….

김=저는 자취하려고 이 방 얻은 거예요. 혼자 살려고요. 근데 왜 친구도 아닌 쌩판 모르는 할배랑 살아야하냐고요?

노인=말이 좀 심한 거 아녀?

김=몰라요. 그냥 내일 아침엔 나가세요.

노인=몰라!

노인 제멋대로 김의 방에 들어간다. 김, 그런 노인 쫓아간다.

김=(어깨를 잡으며) 어딜 마음대로 들어가세요!

노인=(돌아보며) 이거 안 놔?

김=더는 안 되겠네요. 주인한테 말할 거예요.

노인=불러와봐! 자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보자!

주인, 등장한다.

주인=무슨 일이예요?

김=아줌마. 이 할아버지가 자꾸…!

주인=(놀란 듯) 어머. 누구세요? (가까이 가서 얼굴을 자세히 보며) 어? 할아버지?

노인=이봐…! 여기 우리 집인 거 맞지?

주인=할아버지. 계약 끝난 지가 언젠데요.

노인=여기 살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주인=(말도 안 된다는 듯) 무슨 소리예요…. 맞다. 학생. 월세는?

김=저….

주인=학생. 자꾸 그러면 곤란해?

김=죄송해요…. 하지만 며칠만 더….

주인=넘어가는 것도 몇 번째야. 학생, 자꾸 이러면 나도 수를 쓰는 수밖에 없어.

김=제가 사정이 좀 그래서…. 며칠만 봐주세요. 이번 만요.

주인=휴.

김=조용히 살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살게 해주세요.

노인=(끼어들며) 나도 조용히 살 테니까 여기서 살게 해줘.

김=조용히 하세요!

주인=학생, 월세를 못 내는 것도 모자라서 할아버지도 끌어들이고 말야.

김=저 분은 혼자 들어온 거…

주인=(말을 가로채며) 학생이 단호하게 했으면 충분히 내쫓고도 남았어.

노인=내가 이 집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전 주인 한 번 데려 와봐. 걔가 자세히 알아.

주인=이전 주인이요? 돌아가신 거 모르고 계셨어요?

노인=뭣이?

주인=그 할아버지 말하시는 거죠? 그 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암이라던가…

노인=(잠시 벙 찐 듯)….

김=저기요. 여기서 결판 짓죠. 둘 중 누가 나가나 봐요.

노인=그래. 뭘로 싸울 건가?

김=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해야죠. 일단 저희 집이고, 할아버지가 이렇게 고집 부리면 제가 나가는 수밖에 없네요. 전기가 끊기든 뭐든 월세든 뭐든 아무것도 안 내고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노인=그건….

김=아주머니가 결정해주세요. 저희 집인 건 사실인데 집주인이 확실하게 해주셔야죠.

노인=말해주세요.

주인=…. (귀찮은 듯) 나는 몰라. 둘이 일단 알아서 해요.

김=네?

노인=자네 나랑 오붓하게 얘기해보자고.

김=아니. 아주머니. 집 주인은 아주머니고, 지금 이 집에 세입자로 들어온 건 당연히 저 아니에요?

주인=어머. 시간이 이렇게…. 나가봐야겠다.

김=아니 아줌마…!

주인=학생은 월세 안내면 전기도 끊어버릴 거야.

주인,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다. 주인을 쫓아가려는 김. 문 닫히고, 가만히 서있다.

전화벨소리

김=어…. 엄마. (잠시 멈추고) 왜. 왜 울어? 뭐야…. 무슨 일인데. 불안하게…. 그만 좀 울어…. 뭐…? 그게 왜 오늘…. 나 지금 차비도 없는데….

전화기를 든 채 눈물만 흘리는 김. 노인, 말없이 그 모습 본다. 전화는 끊기고, 쭈그려 앉아 우는 김. 울음소리 커지고 빗소리 고조된다. 노인, 말을 꺼내려다 말고 점점 물러선다. 무대 밖으로 나간다. 불이 꺼진다.

다시 불이 켜진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에 누워있는 김. 일어난다. 주위를 둘러본다. 부엌에 나가본다. 아무도 없는 걸 알아챈다.

김=저기요.(사이)

김=누구 없어요?(사이)

김=할아버지?(사이)

김=정말 나갔나보네….(사이)

김=아무도 없네….

김, 부엌을 천천히 둘러보다 방 안으로 들어간다. 옷장 문을 열어본다.

김=여기도 없네….

김, 옷장 안으로 들어간다. 옷장 문이 닫힌다. 무대 어두워진다.

무대 다시 밝아진다. 비가 내린다. 주인. 우산을 들고 김의 집 앞으로 간다.

주인=아우…. 이놈의 비는 맨날 와…. (문을 두드리며) 학생! 학생! (사이)

주인=뭐야. 아무도 없나? (다시 두드리며) 할아버지! 학생!

(사이)

주인=죽었나? (두드리며) 학생! 월세 어떻게 되는 거야! (사이)

주인,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낸다. 문을 열고 들어온다.부엌에도 방에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이상하다…. 중얼거린다.

주인=여기 학생하고 할아버지 본 사람 없어요?!

소리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다. <끝>

당선소감-김미령 / “좁은 방에서 배운 외로움은 글쓰기의 자양분”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은 감정에 적나라한 영향을 끼칩니다.

문예창작과 입시를 위해 용기 좋게 짐 가방을 메고 서울로 왔던 스무 살이 떠오릅니다. 그 추운 겨울 날 홀로 걸었던 낯선 풍경이 아직도 생경합니다.

저는 비좁은 곳부터 다양한 곳에서 거주했습니다. 아직도 제 방에 누워있으면 고립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외로움을 사랑하여 앞으로 더 좋은 글쓰기에 매진하겠습니다.

제가 가장 무너졌을 때 옆에 있어준 하나뿐인 문예창작과 친구들과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또한 열심히 지도해주신 전성희 교수님을 비롯하여 저희 과 교수님들에게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소중히 봐주신 심사위원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죄송했었고 감사합니다. 불완전한 저를 완전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기회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 발판 삼아 더욱이 나아가겠습니다.
약력
-1998년 강원도 강릉 출생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2학년 재학중

심사평-채승훈 / “경제 양극화·노인문제 등 다룬 동시대성 돋보여”
예심을 거쳐서 후보로 올라온 작품들은 총 열편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이었다.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개성과 상상력 등이 뛰어나서인지 읽는 이로 하여금 매우 집중하게 만들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열편을 한 번에 읽었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 단 한편을 고른다는 부담감을 안고 나름대로 심사의 기준을 만들었다. 소재의 참신함, 동시대성을 지닌 주제 의식, 대사 구사력, 구성력, 공연을 염두에 둔 무대화의 가능성 등이 그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일단 ‘옷장 속 남자’와 ‘미노타와 센토를 찾아서’ 두 편을 골랐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심사기준을 만족시킨 작품들이었다. 그중에서 심사숙고 끝에 ‘옷장 속 남자’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미노타와 센토를 찾아서’도 좋은 작품이었으나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인상을 받았다. 차기 작품을 기다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했다.

‘옷장 속 남자’는 현 시대에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 양극화, 그리고 그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동시대성이 돋보인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고독한 처지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노인들의 문제도 함께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유효적절한 말만을 선택하는 대사 구사력과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구성력 또한 느껴졌다. 차기 작품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약력
-수원대학교 교수 / 백상예술대상 수상
-프라하국제연극제최우수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