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0)]어찌하여 부모가

2022-07-06     경상일보

최근 섬으로 휴가를 떠난 한 가족이 그 섬에서 사라졌다가 바닷물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발적인 사고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가 포함된 가족의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10살 어린이가 물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들의 죽음이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천진스런 어린 소녀의 눈망울을 사진 속에서 본 사람이라면 누가 그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 없이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안타까운 물음을 속으로 되뇌고 만다. 어린 딸의 순진무구한 눈을 보면서도 죽음을 향한 여정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딸의 티 없는 웃음 속에서도 그들의 절망을 극복할 힘을 얻지 못했을까.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못난 부모라 하더라도 자녀의 생명과 안전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지키려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다. 특히 인간은 자식의 현재 뿐만 아니라 먼 미래를 위해서 염려하고 준비한다. 한국전쟁 중에 북에 자녀를 두고 월남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그들의 평안을 염려한다.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부디 살아만 있어 달라고 기원한다. 아프카니스탄이 반군에 점령되어 자신의 안전이 위험해진 엄마가 미군기에 매달려 어린 아들을 미군 병사에게 던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어느 곳에 가서도 살아만 있어 달라는 뜻이리라. 이러하듯이 자녀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도 불사하는 것이 보편적인 부모의 삶이다.

이상적이고 희생적인 부모상도 시대에 따라 변해 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한 희생을 힘든 일로 여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다만 사회적인 성공과 행복이 있어야 생존하는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경쟁력 없는 약자로 사는 일은 불행하고 비참한 일이며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과 역사는 그리 가치 있는 것이 못될 것이다. 특히 부모 자신의 성공관이나 행복 기준에 비추어 어린 자녀의 미래 가능성조차 단정하고 예단하려 하는 부모가 있다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이 겪을 어려운 미래가 걱정스럽고 안타깝다고 삶을 포기하는 자신들의 마지막 결정에 강제로 참여시킨다는 것은 사랑을 가장한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자식은 부모의 가치관과 다른 성공관과 행복 기준을 가질 수 있는 엄연한 타인이다. 더구나 생명에 대한 권리는 이 땅의 그 누구도 침해하지 말아야 할 고유의 영역이다. 설사 우리가 믿는 신이라 할지라도 무고한 어린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는 없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믿음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인간관계가 만들어 내는 행복도 재물이 지켜주는 안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래도 인간이 추구하는 수많은 가치 중에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은 사회가 존속하는 한 지속되고 보존되어야 할 가치임이 분명하다. 이 가치는 돈이 많아지고 살기가 편해진다고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천재시인 기형도는 중풍에 걸린 남편과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엄마 걱정’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에서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 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오육십 년 전의 가난한 엄마들은 목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녔다. 기형도의 엄마도 여인의 작은 목으로 온 가족을 지켜낸 모양이다. 그리고 아들은 이런 눈물어린 시를 남겼다. 이것이 한국의 가족이고 부모이지 않겠는가.

김상군 칼럼니스트·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