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낙태 규제의 딜레마와 미국의 판결
우리나라에서 미국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엄연히 다른 나라인 미국의 판례나 법 제도가 딱히 관련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업무나 심지어 일상 속에서 느닷없이 발견되어 놀라게 될 때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최근 판례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미국시간으로 지난 6월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시시피 주법으로 제정된 임신기간법(Gestational Age Act)의 위헌여부가 문제가 된 사건에서 동법이 합헌임을 선고했다(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판결, 이하 돕스 판결). 임신기간법은 의료적 응급상황이나 태아에 심각한 건강이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임신 15주 이후에 행해지는 낙태를 금지하는 주법인데, 이 법이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및 1992년 캐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판결을 통해 헌법상 권리로 확립된 낙태권에 반하는지 여부에 대한 연방대법관 9인의 심사 결과 6대 3으로 합헌임이 선고된 것이다. 이 판결은 시차 없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아주 자세히 그 내용이 소개되었는데, 선고 시점이 지난 달 시론에 게재될 원고를 보낸 직후여서 지면을 통해 경상일보 독자들께 속보를 전할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늦었지만 금번 지면을 빌어 돕스 판결에 대해 상술하고자 한다.
어느 나라에서든 중요한 법원 판결이란 그 결과가 단순히 당해 소송의 당사자들만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과 제도를 포함해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막대한 경우를 뜻하는데, 이번 판결은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선고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돕스 판결의 반향은 잦아들기는커녕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찬반의견을 격렬하게 표시하고 있고, 여기에 낙태 관련 찬반논쟁에서 기존 주장을 주도하던 여성단체와 종교단체 뿐 아니라 후속 입법에 대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주 정부,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까지 판결결과에 대한 비판을 통해 논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돕스 판결 이전 미국에서 낙태는 앞서 인용한 판례들을 통해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4조상 보장된 것으로 확인된 기본권이었다. 기본권이라 하여 무제한적 자유가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고, 임신기간을 셋으로 나누어 초기 3개월 간은 임부(妊婦) 자신의 재량으로, 이후 3개월은 임부의 건강이 처한 위험 여부에 따라 제한적으로, 마지막 3개월은 임부의 생명에 위험이 초래되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되는 3단계 위헌심사기준의 법리에 따라 낙태를 규제·금지하는 주 입법의 위헌성 여부를 연방대법원이 심사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인해 기존 판례들은 모두 폐기되었고, 낙태는 임부의 헌법상 권리가 아니며, 위법성 여부는 주 입법의 재량 하에 놓이게 되었다.
돕스 판결을 그저 남의 나라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낙태가 본질적으로 생명권과 자기결정권 간에 양보가 불가능한 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으로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관련 법적 규제 여부가 사회구성원들 간 첨예한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사안인데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생성한 판례법리가 다른 나라들의 관련 사법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문의 위헌성 여부를 여러 차례 헌법소원심판의 형태로 판단해 왔는데,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자기낙태죄와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으로써 기존 판례를 변경한 바 있다(2017헌바127). 이 판례 전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재판관 3인의 단순위헌의견이 임부의 자기결정권 보장과 관련해 3분기 구분법에 의한 기준을 사용하는 등 기존 미국 판례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정부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한 입법개선 절차에 착수하여 개정안을 마련하고 여론수렴을 거친 바 있으나, 판례가 정한 개정 기한을 넘겨 관련 법률조항이 자동 폐지된 현재까지 대체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아 입법 공백상태에 있다. 폭발력이 큰 사안 특성과 정 반대의 결론을 내린 두 나라의 판결로 인해 관련법 개정은 법익의 숙고가 아닌 정치적 편가르기의 결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관련 법익들이 헌법질서 속에서 비로소 보장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헌법재판소 판례의 취지를 존중하는 입법이 미뤄져서는 안된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