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고물가 시대의 고통 완화를 위해

2022-07-28     경상일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지난 6월 전년동월대비 9% 넘게 상승한 것은 40여년만의 일이다. 40여년전 미국은 폴 볼커 연준의장이 고인플레이션에 대응하여 금리를 20%까지 올리면서 실업률이 10%에 달하는 등 고통의 시기였다. 6월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6%까지 올랐는데 이는 24년 전인 1998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 우리나라도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단기금리가 20%에 달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눈물겨운 시간이었다. 중장년층 이상 세대에게 고물가 시대의 경험은 고통의 기억이다.

1년전만 해도 설마 했던 고물가가 이제 현실인만큼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1978년말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에 도달한 뒤 3년이 지나서야 그 아래로 떨어졌다.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의 경우 다행히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면서 물가도 1년후에는 상승세가 크게 둔화되었다. 그럼 이번에는 어떨까? 앞으로 몇 달간은 지금보다 더 높은 상승률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해 3분기 후반이나 4분기 초 정도에는 정점에 도래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세계 및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세가 점차 약화되면서 수요측 물가상승 압력이 완화될 전망인 데다 지난해 중반부터 물가상승이 본격화된 데 따른 기저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때 120달러를 웃돌던 국제유가가 최근 100달러 밑으로 떨어진 것도 경기후퇴에 대한 우려에 일부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고물가시대가 금방 저물것이라는 낙관도 금물이다. 최근 가파른 물가상승은 코로나19로 위축되었던 생산능력이 빠른 수요회복을 따라가지 못하여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원자재 등 생산비용이 높아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 도시봉쇄 등으로 심화되어 지금도 공급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이 여전한 상황이다. 뿐만아니라 코로나19와 미·중, 미·러 간 갈등 등으로 공급망의 효율성보다는 안정성이 더 중시되고 국가안보와도 연계되면서 과거 물가안정을 견인했던 국제 분업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점도 물가불안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이에 따라 물가상승의 정점 이후에 급속히 낮아질 가능성보다는 완만하게 떨어져서 높은 물가 수준이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높은 물가상승세가 상당기간 이어지다보면 경제주체 간에 연쇄적인 반응을 유발한다. 원재료가격이 오르면 제조업체는 제품가격을 올리고, 유통업체도 판매가격을 올릴 수 밖에 없다. 물가대비 실질소득이 줄어든 소비자들은 임금 상승을 요구할 것이며 노동비용이 상승한 기업에는 또다시 가격인상 압력이 커진다. 특히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소폭의 경제지표 변화에도 경기나 물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변할 수 있고 이는 자기실현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 각 경제주체가 가격과 임금을 서로 올리고 다시 전반적인 물가가 더 오르는 상황이 반복되면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인 결정이더라도 고물가 상황이 고착되어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악순환(vicious cycle)이라고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기대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한국은행도 최근 사상 최초의 빅스텝(Big step)으로 금리를 0.5%p 인상하였다.

빠른 속도의 금리 인상은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특히 취약계층과 중소기업의 채무부담을 가중시켜 금융안정도 저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물가대응에 실기하면 향후 더 큰 폭의 금리인상이 불가피하며 더 큰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경기침체 우려가 점증하고는 있지만 취업자가 계속 늘어나고 기업과 개인의 재무상황이 안정되어 있는 등 아직은 충격을 견뎌내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도 잠재성장률을 상회하는 2%대 성장이 내년까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힘들더라도 성장보다 고물가의 고착화를 막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폴 볼커 연준의장의 고금리는 결국 고물가를 잡아 1980~90년대 미국경기 호황의 밑거름이 되었다. ‘매를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더욱 와닿는 요즘이다.

배용주 한국은행 울산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