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팔려가는 당나귀’의 경우

2022-08-03     이재명 기자
얼마 전 고향에 갔더니, 텃밭에는 그동안의 극심했던 가뭄을 이겨낸 고추가 주렁주렁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는 더위를 피해 새벽에 두어 시간 익은 고추를 딴다고 하셨다. 일기도 고르지 않은데 연세 생각해서 일 너무 많이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리면, 60년 이상을 농사에 이력이 난 당신께서는 “나는 꾀가 없는 줄 아느냐?” 하시며 힘 부치지 않게 적당히 일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도리어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사실, 몇 년 전 어머니가 몸이 좀 불편해서 치료차 서울 동생 집에 머무셨을 때 농사에는 문외한인 필자가 고향에 들러 잠시 밭일을 한 적이 있다. 마침 5월 초라 고추 모종을 이식해야 할 때였는데 시기를 놓치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동네 지인이 갈아준 텃밭 이랑에 잡초의 생육을 억제하기 위해 검은 비닐로 멀칭(mulching)을 하고 모종삽으로 구멍을 뚫은 후 한 포기씩 심는 일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왕초보인 내가 하는 것이 서툴러서 안쓰러워 보였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비닐 아래 거름은 잘했는가, 땅을 깊이 파면 고추가 숨을 못 쉬네, 40~50cm 간격으로 해야 하는데 너무 달게 심었구먼, 뿌리에 흙을 덮으면서 바로 호스를 꽂고 물을 주게나, 아예 지주대를 다섯 포기 간격으로 꽂으소, 동작이 너무 떠서 한 줄 심는데 하루 종일 걸리겠군”이라는 등등….

물론 농사에 미숙한 필자를 도와주려는 주위 사람들의 충정(?) 어린 조언이지만 그들 말대로 다 따라 하다가는 고추 심기는커녕 내가 먼저 탈진할 것 같아 한 귀로 흘려버린 것도 많았다.

길가의 농사는 입 대는 사람이 많아 짓기 어렵다는 옛말이 있다. 관심도 너무 과하면 무관심만 못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남의 잔치에 왈리왈률(曰梨曰栗), 참견하거나 관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방앗간 집 주인과 그의 아들이 당나귀를 팔려고 시장에 가는데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나귀를 타지도 않고 끌고 가는 바보가 어디 있냐며 수군거렸다. 이 말을 들은 마음씨 좋은 아버지가 당나귀 등에 아들을 태우고 가다가 나이 든 마을 사람들한테 버릇없이 젊은 것이 타고 간다고 핀잔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내리게 하고 아버지가 타고 가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어린 아들을 걷게 하는 비정한 아버지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결국 부자(父子)가 함께 나귀 등에 올라타게 되었고, 그때 다리를 절뚝이며 힘들게 걷는 짐승을 보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 동정을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 불쌍한 당나귀 다리를 끈으로 묶고 기다란 막대기에 끼워 어깨에 멘 채 다리 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 흥미로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야유하는 바람에 놀란 당나귀가 버둥거리다가 강물에 빠져 버렸다.”



흔히 알고 있는 이솝 우화 ‘팔려가는 당나귀’는 남의 말만 듣다가 낭패 보는 이야기이다. 어떤 일을 하는 데에 100% 완벽한 방법은 없다. 그러니 좀 안다고 너무 으스댈 일도 아니고 초보라고 주눅 들거나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턱대고 따를 일도 아니다. 세상사 하루아침에 관록이 붙는 것도 아니고 시작하면서부터 전문가가 되는 일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자신의 손에 맞게 익혀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귀가 얇은 ‘팔랑귀’여서도 안 되고 반대로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려는 ‘오지랖’ 넓은 것도 경계해야 한다.

때로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도 필요하지만 중구난방으로 흐르기 쉽고, 다른 이에게 조언해 주는 것도 장려할 일이지만 불필요한 간섭이 될 수 있으니 이 둘을 조화롭게 조절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좀먹는 경우가 없도록 주의해야 할 일이다.

길가의 고추 농사를 경험해 보니, 많은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경청은 하되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건강한 소신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