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루르의 기적을 넘어 울산 정체성을 재확립하자

2022-10-17     경상일보

지난 10월7일 제103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울산에서는 17년만이다. 종합운동장 개회식 점화에서 다이빙 선수인 최종 주자가 성화를 들고 다이빙해 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개막 행사에 등장한 울산의 상징과 이미지는 고래, 반구대 암각화, 태화강과 십리대숲의 국가정원, 해 뜨는 간절곶, 산업수도, 친환경 산업도시, 울산 큰 애기 등 다양했다. 그런데 도시 정체성(identity) 차원의 울산의 대표 이미지는 무엇인가?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재현…” 이 글귀는 1962년 2월3일 울산을 공업입국 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공업 특정지구’로 지정하고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타’를 건립하는 기공식 치사문에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루르’는 독일의 거대 공업도시를 형성한 루르(Ruhr)지역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치사문은 또 “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라고 잇고 있다.

이 치사문은 당시의 공업센타 지정 선언문과 함께 남구에 있는 울산공업센터기념탑(공업탑)에서도 볼 수 있다. 필자는 10여 년 전 처음 거기 갔을 때 이 글을 보고 전율을 느끼며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다.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라니! 오늘날 친환경 시대에서 보면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로부터 시민들은 공업화를 위한 이주와 실향의 아픔을 겪고 오염의 희생도 치렀지만, 대기 속의 ‘검은 연기’를 그린 그 날이 오늘의 대한만국 ‘산업수도’ 울산을 세우기 위한 출발의 날이었다.

그 후 1967년에 세워진 공업탑의 건립 취지문은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에도 신라 천년의 슬기로운 역사가 담겨져 있는 이 터전…”을 강조했다. 또 2012년의 ‘울산 재도약 선언문’은 “울산은 겨레의 아침을 연 영광의 터전…”으로 시작해 ‘백두대간과 동해, 가지·신불과 풍요로운 대지, 태화강과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천년 신라의 꽃, 겨레의 곳간, 산업의 불꽃’이며, ‘조국 근대화의 메카요 산업수도로서 국부의 원천임’을 자부했다. 또 ‘사람과 자연을 근본으로 하는 노동 가치와 기업가 정신의 세계적 친환경 산업수도’ ‘자율과 창의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고 정의로운 문화복지도시’를 천명했다.

울산의 비전은 무엇인가? 도시나 기업의 정체성은 그에 대한 내·외부 고객의 인식 실체로서 그 홍보를 넘어 생존과 비전의 기초가 된다. 물론 이미지 통합 전략(CIP)은 시각화·단일화가 중요하나 다양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체계화는 필수다. 울산의 경우 그동안 구축해 온 개념과 상징 모두를 끌어다 체계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고래와 신라의 영성(榮盛), 천년 신라와 산업의 곳간, 친환경 산업수도와 문화복지도시 등은 서로 조화가 어려운 것들이다. 그동안 어떤 계기마다 지향하는 가치는 다 동원되어 혼재된 느낌이다. 울산광역시 휘장에는 용의 여의주가 있고 시의 마스코트는 고래 해울이, 꽃은 장미다. 공업생산과 산업수도, 고래, 조선 중공업은 그래도 이미지 연결이 가능해 보인다. 쉽지 않겠지만 울산에 가칭 ‘도시 정체성위원회’라도 만들어 정체성과 비전 재확립을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 루르지역이 도시재생의 모범이 될 지도 모른다. 문화 주도형 도시 재생 전략(Urban Regeneration Strategy for Culture-Service-based City)이 성공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지역의 뒤셀도르프에 가본 적이 있으나 라인 강변에서 마치 고래처럼 움직이는 큰 배를 본 기억만 있다. 어떤 면이든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선인들의 위 세 문언이 모두 ‘신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는 방안으로 인접한 문화도시 경주와 손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체성위원회를 경주와 공동으로 구성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옛날 애달픈 ‘검은 연기와 천년 신라의 영성’ 그리고 ‘친환경 산업수도와 문화복지도시’의 조화도 가능할 것이다.

전충렬 전 울산시 행정부시장·행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