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자유에 대한 갈망

2022-12-05     경상일보

자유라는 단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던 르네상스시대나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던 혁명의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21세기에도 자유를 외치는 것은 아직도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전을 들추어 보니 제12조부터 제22조까지 신체, 거주·이전, 직업선택, 주거, 사생활, 통신, 양심, 종교, 언론·출판, 집회·결사, 학문, 예술 등이 열거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의무교육기간이 있다. 의무교육을 이행을 해태하면 부모에게 제재가 주어진다. 그런데 그 의무교육을 받을 기간중에 있는 학생이 학교를 가기 싫다고 하면 그 학생의 놀 자유를 제한하면서 학교에 보낼 권리가 있는가. 부모에게는 보호교양권이 있고 이를 확대해석해서 체벌권이 있다고 믿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의 보호교양은 의무가 중점이지 권리로는 축소해 해석한다. 가용소득에 비해 통신비용, 이동비용이 과도하게 비싸면 서민들의 통신과 이동의 자유는 공염불이다. 일례로 가끔 일본에 가 보면 신칸센 등 철도이동비용과 택시비용이 매우 비싼데 이렇게 되면 이동의 자유는 줄어든다. 돈 없는 자유가 자유일까.

자유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자유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인 자유도 있다. 국가는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몽테스키외가 고안한 삼권분립이라는 억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통해 권력이 집중되지 않게 해 자유보장을 도모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헌법에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할 의무를 지도록 했고.

컴퓨터와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면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질 듯 환상에 빠진 시절이 있었다. 조직화, 기계화, 정보화가 인류의 자유를 더 확대시키기는 커녕 10명이 하던 일을 1명이 잘 처리할 뿐 자유는 요원하다. 오늘도 샐러리맨도 무직자도 자유를 고대하면서 힘든 일상에 파묻혀 있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당위만이 존재의 가벼움을 비웃고 있다.

중세시대에는 초야권(영주가 영지에 있는 모든 여자와 첫날밤을 지낼 수 있는 권리)을 당연시 여기며 살았다. 지금이야 성적자기결정권이 확립되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주로 신체적인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등 신병에 관한 자유가 중심이었다면 현대에는 경제적인 자유로 중심이 이동되었다. 피터 드러커가 예측한대로 권력이 공적관계에서 사적영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과거에는 자유억압이 상하관계였다면 지금은 수평관계가 더 문제다. 새로운 정부가 공정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외치는 일면에는 이런 변화가 연동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힘 있는 상위계층은 자유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 그에 반해 하위계층으로 갈수록 공정한 사회와 상식있는 환경을 갈망한다. 유행하던 책 이름처럼 ‘부자아빠와 가난한 아빠’가 학력을 좌우하고 학생기록부에 좋은 경력이 만들어 줄 가능성이 높다. 딱 하루에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으로 그 다양한 인생의 역사가 모두 반영된다고 믿는 단편적 사회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후반전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나.

새벽같이 직장에 나가고 백분의 일도 맘에 없는 회식에 참석하면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를 피할 수 없고 합의에 따른 규칙을 따라야 하며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가 행사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 모두 고타마 싯다르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그래도 베수비오산의 화산폭발로 폼페이의 하늘에 흙비가 내리는데도 주인의 명을 기다리며 미이라가 된 노예의 후예는 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전상귀 법무법인현재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