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공즉일 사즉만수(公則一 私則萬殊)

2023-02-13     경상일보

1586년(선조 19년) 조선을 뒤흔든 송사가 일어났다. 안처겸의 아들인 안로의 아내 윤씨가 송익필의 송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윤씨를 필두로 한 안씨 집안 27인이 70여인의 송씨 집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비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송씨 집안이 소송에서 패하면 가문의 몰락이었다.

송익필은 조선 중기 서얼 출신 유학자 정치인이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였으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서인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하였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오른 공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 참가한 양반이었으나, 외증조모가 안처겸의 조부인 안돈후의 비첩(계집종인 첩)이었다. 안처겸과 송사련은 안돈후의 손자들이었으나, 송사련의 고발로 안처겸이 역모죄로 처형되고 안씨 집안은 몰락한다. 그로부터 60년이 넘어서 안씨 집안은 송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천하면, 그 자손은 노비가 된다. 송익필의 외조모인 감정이 안돈후의 비첩인 중금의 딸이므로 감정은 노비이며 그의 자손인 송사련, 송익필등 송씨 집안 사람들이 안씨 집안의 노비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의 법제에서는 보충대라는 제도를 만들어 비첩의 자손들도 양인이 되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외조모인 감정이 보충대에 편입됐는지를 보아야 하지만 100여년 전의 일이다. 또한 과한법이라는 제도를 마련해 당사자가 없는 60년 전의 일은 심리를 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 송사를 송관들은 기피하려고 했다고도 한다. 안씨 집안의 소장은 받아주는 것이 위법이었다. 그러나 동인인 안씨 집안은 그 당시의 동인 집권세력들에 힘입어 서인인 송씨 집안을 복수하고자 장시간 여론을 형성했으며, 집권세력에 힘입어 소장을 접수시키고 송관으로 하여금 확실한 증거를 부정하고 법 적용을 교묘히 비틀어 결국 송씨 집안을 노비로 판정을 내리게 하고 말았다. 그 후 영조대인 1751년에 가서야 송익필은 복권이 되었다. 송관의 치우친 판결이 한 가문의 몰락을 가져왔고 동, 서 양 당파의 맞대결을 더욱 심화시켰는지 모른다. 공정한 판결의 중요성을 세삼 실감한다.

진료실에서도 가끔 보험서류를 들고와서, 진료받은 사항이 보험금 수령에 해당되는지 문의하는 분들이 있다. 증거(방사선 사진, 진료기록부)를 면밀히 살피고 보험 약관을 꼼꼼히 읽은 후 해당 진료가 보험금 수령에 적합한지를 판단해 서류를 작성해 드린다. 혹시 해당사항을 빠트리거나 잘못 적용해 판결에 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하고, 비록 해당이 되지 않는 사항에도 사심이 들어 허위 작성을 하지 않도록 매사에 마음을 다독인다.

온 나라가 송사로 뒤숭숭하다. 날마다 새로운 송사를 내세우며 양측의 날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한쪽은 온갖 정황 증거를 내세우며 상대편을 몰아세우는가 하면, 상대편은 한낱 소설이라며 의문을 일축하고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은 재판에서 결론이 나겠지만 지리한 법정 소송이 예상된다. 이처럼 온 나라를 뒤흔드는 송사를 책임지고 양측이 납득하도록 판결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송사에서 패한 쪽은 사회적 비판에 빠질 것이고 회복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송사일수록 명백한 증거와, 명확한 법률의 해석과 적용에 의한 판결이 요구될 것이다. ‘의리가 공정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가지이지만, 사사로운 마음일 때는 만인의 마음이 다를 것이다(公則一 私則萬殊)’라고 했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공정한 마음으로 판결을 하기를 기대한다.

손재희 CK치과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