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CEO포럼]미스터 촌놈
내가 옷에 대해, 패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촌놈’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미적 기준에 대해선 나름 센스가 있다는 자부심으로 지내왔던 나는 새로운 환경인 대학에 진학하자 대중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도 잘 모르는 사투리 쓰는 지방 출신 촌놈에 불과했다. 나는 촌스러움과 신체적 결함을 감추려고 트렌드를 빨리 받아들였다. 나를 감추고 내가 동경하는 것을 따라가려는 의지의 표현이 당시 나의 패션이었다. 그렇게 막연히 트렌드를 좇으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패션을 보는 눈이 제법 성장했다.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특징도 찾고, 취향도 발견하고, 좋아하는 패션과 어울리는 패션도 구분하게 됐다. 비판도 하고 환호도 하면서 패션으로 나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고, 나를 설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의 관점에서 패션은 유니크한 액세서리나 새로운 옷(신상)으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나를 치장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아니다. 미디어에서 제안하거나 연예인이 광고하는 신상을 매 계절마다 사서 입는 것 또한 아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와 트렌드에 민감한 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TPO, 즉 시간(Time)·장소(Place)·상황(Occasion)을 먼저 인지하고, 현존하는 수만가지 패션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나의 기준과 경험을 참고해 적절한 조합을 찾아 표현하는 것이 패션이다.
거기엔 나의 고집과 트렌드 사이에서 얼마만큼 양보하고 적용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이 따른다. 회의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유로운 1과 격식의 10 사이에서 얼마만큼 격식을 갖출 것인지, 1이 클래식이고 트렌드가 10이라면 디자인과 색상은 어느 정도를 표현할 것인지. 옷은 물론이고 가방과 시계, 반지까지 하나하나 선택을 필요로 한다. 나의 고집과 변화, 클래식과 트렌드의 적절한 선택이 패션의 감각인 것이다.
패션의 능력이란 선택을 위해 참고할 나의 경험과 정보의 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나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키워나갈 때 치우쳐지는 방향을 취향이라 하겠다. 예전엔 패션잡지가 주요 정보였지만 오늘날엔 인터넷으로 엄청난 양의 국내외 패션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하이엔드는 물론 SPA 브랜드까지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연·월간의 변화를 바로바로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제품으로 표현해준다.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좇는 더 빠른 정보력은 트렌드의 획일화를 만들어낸다. 남들이 입는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똑같이 입었는데 패션을 모른다고 욕먹는 패알못(패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미디어의 발달이 가져온 트렌드의 획일화는 희소식이 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어디서 구매를 하든지 오늘 사면 가장 최신의 트렌드다. 요즘 유행하는 티셔츠의 길이, 청바지의 라인, 신발의 종류를 굳이 연구할 필요 없이 하나의 브랜드를 정해서 한 번에 사면 트렌드의 고민이 해결된다.
문제는 하이엔드 고가의 의류, 트렌드에 민감한 옷을 입는다고 더 멋쟁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트렌드의 빠른 변화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나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는 것이 먼저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마른 사람과 덩치가 큰 사람,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자유로운 대학생 등 다양한 체격과 상황이 존재하기에 정답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트렌드를 읽고 따라가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트렌드를 참고해서 패션으로 나를 정의하고자 하는 목표가 필요하다.
트렌드와는 정반대의 철학으로 자신만의 패션을 만들 수도 있다. 늘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패션에 신경 쓸 시간에 자신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겠다고 하는 이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항상 회색 티셔츠만 입는 마크저커버그와 검은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은 스티브잡스다. 패션으로 아이덴티티를 표현한다는 의미로 옷만으로도 그 사람을 연상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거야말로 궁극의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패션으로 보여주고 싶은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패션은 명함을 건네기 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나의 첫인상이자, 오늘 나의 기분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나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전투복(?)이다.
정영진 갤러리리아 대표 삼영화학 대표 본보 차세대CEO아카데미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