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정치는 종교를 보고 배운다는데
난세때마다 현자 나타나 자비·윤리 실천
종교 지도자마저 타락해버린 이 시대에
선한 정치지도자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축(軸)의 시대(Axial age)’는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7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류는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원전 900년과 서기 200년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정신·철학·종교의 핵심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4대 성인이라 불리는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를 비롯한 인류 지성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인물들이 나타난 이 시기를 일컬어 ‘축의 시대’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식과 논리를 집대성해서 종교와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을 등장시켰고, 인도의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정신적으로 높은 깨달음을 얻은 후 피지배계층인 중생을 위해 불교를 창시했다. 중국의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인간의 내면과 역사의 탐구를 통해 인간다운 세상과 보다 나은 국가통치에 대한 철학 근간인 유교를 창시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받아들여 기독교를 출발시켰다. 4대 성인의 탄생은 농업혁명 이후 최대의 경이로운 사건이었으며 지난 2000년 역사는 이들의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진보했다.
2009년 4월 어느 날, 경기도 성남 남한산성 기슭에서 6평정도 되는 작은 처소에서 한경직 목사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땅 한 평, 집 한 채는 고사하고 심지어 예금통장 하나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1인용 침대, 안경, 그리고 헤어진 양복 몇 벌과 낡은 성경책이 전부였다.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프턴 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 목사였으며, 상을 받을 때도 자격이 없다며 극구 사양했었고 상금도 북한 동포를 위해 써달라고 전액 기부했다. 한목사의 청빈한 삶은 그 자체로 한국교회의 빛나는 자산으로 남았다.
1993년 11월4일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보다 더하구나”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한 스님이 계셨으니, 그가 바로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철 종정이다. 불교계의 수많은 갈등을 침묵으로 잠재우셨고 갈등의 순간 마다 그의 법어가 해결책이 됐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것은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문구가 그렇게 격한 갈등을 해결했다. 누구를 탓하는 말이 아님에도 자기의 행위를 성찰하게 한 것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은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맞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얼룩진 역사 현장에서 언제나 증인처럼 우뚝 서서 정의를 지켰다. 우파에 저항했지만 좌파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은, 이 나라의 참 어른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은 그의 책 <축의 시대>에서 현자들이 끔찍하고 야만적인 상황에서 자비와 윤리를 발전시켰다고 했다. 기존 틀에 의문을 제시하고 새로운 이념을 만들었으며 치열한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종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5000년의 역사를 지닌 가난한 나라가 경이로운 발전을 거듭한 지난 70여년은 한경직 목사, 성철 종정,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이 땅에서도 ‘축의 시대’라 할만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군부독재의 숨 막히는 현장에서도 숨을 쉴 만 했는데 이제 그들마저 없으니 종교가 타락하여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경제는 정치를 보고 자라고, 정치는 종교를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다. 탐욕에서 자유로운 종교 지도자조차 없는데 선한 정치지도자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도 좋다.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권력자들이 두려워하고 세상 사람들이 고개 숙인다면 그게 더 좋을 것이다.
서재곤 대형타이어유류(주)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