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봄에 죽자? 봄에 피자!

2023-04-20     경상일보

얼마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글로리’의 한 장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학교폭력으로 지옥에 살던 동은이가 자살을 결심한 후 강에 갔는데 먼저 뛰어든 할머니가 있었죠. 시커먼 강물이 두려워 망설이던 동은은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게 되니 구하러 뛰어듭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주며 나옵니다. 이 할머니는 동은이 옷이 무거워 힘들었다며 타박하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시죠? 물이 차니 우리 봄에 죽자고 합니다.

다정한 이 한마디에 동은은 자살하려는 곳에서 처음 만난, 강에 뛰어들었던 할머니 품에서 통곡합니다. 나중에 같이 죽자는 말이 대단한 위로가 된 것이죠. 동은이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위로가 된다는 느낌을 받으며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 엄청난 지지의 효과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삶을 놓고 싶었던 고통의 공유, 물이 찰 것이라는 공감, 우리 같이 조금 더 살아보자라는 진심 어린 마음의 힘이었습니다. 봄에 죽자는 말은 봄에 피자는 의미임을 동은은 어른이 되어서 깨닫습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최고로 높습니다. 학교폭력 당하는 어린 학생, 독거하는 노인, 가정폭력과 이혼, 묻지마 폭력 등으로 이어지며 반복되는 상처 속에 우리는 참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학교폭력 종합대책으로 학폭 전력을 대입 수시전형에서 정시전형에까지 확대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또 학교생활기록부의 중대한 학폭 가해 기록 보존기간을 취업 때까지 늘리는 방안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가해자에 대한 경고도 필요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이웃의 힘을 보태는 것이 절실합니다. 피해자의 옆에서 안아주고 같이 울며 우리 한 계절만 더 견디어보자고 부탁해주는 이가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일 년만 견디어내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너도 편들어 주는 사람은 있어야지”하며 꽃을 내밀어 준 저 할머니처럼 학폭 피해자에게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는 가장 훌륭한 공감이고 같은 편에 서는 것입니다. 공황장애 자조 모임, 알콜중독 치료 자조 모임 같은 것이 오랜 세월 효과가 있는 이유는 동변상련의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한걸음, 한걸음이죠. 물론 무너지고 찢겨진 마음을 다 회복할 수 없고 폭력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점은 동은이 가해자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 그들의 사과를 받고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고, 피해자 자신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출발선일 것입니다. 연대의 첫 줄은 피해자의 부모일 것입니다. 내 아이가 폭력을 당했다면 흥분해서 아이를 비난하고 교장실로 달려갈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너의 편이라고 아이를 안아주고 정당한 복수를 치밀하게 준비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증인과 증거를 준비해서 가해자들의 사과를 받아내고 법대로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의 치유에도 꼭 필요합니다. 방관할 수 있는 이들을 정의의 편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지혜로운 전략입니다.

그런데 참 힘든 과정입니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가 지옥을 겪었던 것을 알고 마음이 무너지기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학교폭력피해자 가족협의회’ ‘울산 십대들의 벗’ 등 회복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서 매뉴얼대로 신중히 진행하는 마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이와 어머니는 심리검사 및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교육청 지원을 받아 시작해야 합니다. 가해자의 사과가 없고 증거나 증인이 부족해 좌절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피해학생이 회복하고 있다면 차분하게 하나씩 해결한다면 될 것입니다.

우리 봄까지 한 계절을 더 살아보자는 격려, 봄이 올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봄에 필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이 학교 폭력 피해 학생들에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동은의 방에 난입한 가해자들과 달리 신발을 벗고 들어온 하도영씨 처럼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배려와 심성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어른의 역할일 것입니다.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