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김선우 ‘등’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세상에서 가장 넓고 따뜻했던 우리들의 ‘피난처’
이 시를 읽으니 권정생 선생님의 <엄마 까투리>가 생각난다. 숲속에 불이 나자 엄마 까투리가 아기 까투리들을 가슴에 품어 살리고 자신은 불에 타 죽는다는. 까맣게 탄 엄마의 날개 밑을 둥지 삼아 지내던 아기 까투리들이 다 자라서 엄마 품을 떠나자 그만 등뼈가 부서져 내렸다는. 그러니까 등은 가장 끝까지 남아서 지켜주는 피난처이자 보루 같은 게 아닐까 하는. 버스정류장에서 하교하는 나를 기다려서 가방을 받아 들고 성큼성큼 앞서가던 아버지의 굽은 등이 생각난다. 커다란 곱사등 속에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더라는 우화도 생각난다.
사실 가슴과 등은 둘이면서 하나인 몸이다. 안는 것과 업는 것은 사랑을 전하는 같은 움직임이다. 아이를 업은 포개진 두 손과 죽은 새의 등 뒤에 포개진 두 날개의 상동. 그 날개는 바로 알을 품어 새끼 새에게 날개를 달아주던 날개 아닌가. 날개의 뿌리는 등에 있으니, 어미와 새끼는 서로 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라는 의문. 그건 아직 ‘업혀 있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혹은 등에 대한 뭉클한 기억 때문 아닐까. 넓고 따뜻하고 아늑했던, 가장 큰 세상이었던 등.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