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전세와 금융의 역할
2023-05-01 이재명 기자
한국에서 전세가 언제부터 성행하게 됐는지를 검색해보면, 1876년 강화도조약을 전후로 등장했다는 흔적과 1970년대 산업화를 전후로 일반화되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시기 모두 각각의 이유로 서울의 인구가 급작스럽게 증가했고, 이로 인한 주택 수요·공급의 불균형이 주택 가격을 급등시키면서 자연스레 전세 계약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장 주거를 위한 주택이 필요하나 가격이 급등 해버린 주택을 구매하기에 다소 버거운 상황인 임차인의 니즈와 주택 가격 급등세에 올라타 소규모 종자돈으로 레버리지 투자를 하고자 하는 임대인의 니즈가 만나 계약자 쌍방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다. 임차인과 임대인 모두 그 목적과 용도가 다를 뿐 주택을 차지하고자 하는 의지는 같은데, 가격에 비해 부족한 구매 자금으로 그 의지를 이루려다 보니 서로의 니즈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당시 부동산 관련 금융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기에 전세 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주택에 대한 필요를 소유와 거주로 분리해 보자. 자가 주택의 경우는 해당 주택을 소유한 자가 거주까지 하는 것인데, 소유할 필요는 없고 거주할 필요만 있는 자와 거주할 필요는 없고 소유만을 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소유만 하고자 하는 자가 주택을 구매한 후 거주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임대를 하고 사용료를 수취하면 된다. 이것이 일반적인 월세 임대의 방법이고, 이렇게 소유와 거주는 거의 완전히 분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해당 주택의 가격이 폭락해 문제가 생겼을 경우, 거주를 필요로 하여 이용하고 있던 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전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일까? 전세는 거주하고자 하는 자와 소유하고자 하는 자가 자금을 공동으로 각각 선순위, 후순위로 투입해 주택을 구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소유에 대한 부분 중 일부가 임차인에게도 남겨져 있다고 봐야 한다.
금융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중 하나는 시장 참여자들 각각의 니즈를 구조적으로 매치시켜 모두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시가 잉여 자금을 투자하고자 하는 참여자와 부족 자금을 대출하고자 하는 참여자 사이에서 편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여기서 구조적으로 매치를 시킨다는 것은 각각의 잉여 자금과 부족 자금을 일대일로 매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잉여 자금 전체와 부족 자금 전체를 비슷한 성격의 자금끼리 쪼개거나 합쳐서 전체적인 자금의 흐름이 매치가 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각 참여자의 니즈에 최대한 정확히 편리를 제공하면서, 전체 풀에서의 미스매치는 최소화하는 것이 발전된 금융이 하는 일이다. 한국의 주택 거래 시장에서 전세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부작용들에 대해 금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을까? 전세를 선호하는 임대인, 월세를 선호하는 임차인, 월세를 선호하는 임대인, 전세를 선호하는 임차인, 이들의 니즈를 구조적으로 매치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 전세 거래가 단기간에 없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세 거래로 인한 부작용도 많지만 순기능 또한 무시하기 힘들다. 전세를 주거를 담보로 한 개인 간 대출로 본다면, 안 그래도 GDP의 100%를 상회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뇌관이라 여겨지는 가계대출 규모를 150%를 상회하는 것으로 고려해야 한다. 반대로 전세 제도는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안전판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혹자는 전세를 파생상품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는 스왑 거래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던 개인 간 거래가 아니라 금융의 영역에서 규제 하에 관리된다면, 한 개인이 무한히 신용을 창출하는 일 같은 건 어려울 것이다. 발전된 금융의 부재가 전세 거래가 성행하는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면, 이제는 금융이 그 부작용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서병기 유니스트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