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301)]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23-05-02     이재명 기자

필자가 사는 동네 들판에는 못자리가 한창이다. 또 밭에는 고추를 심느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쁘다. 그런데 고추는 그냥 심으면 되지만 못자리는 여간 공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요즘에는 제품화된 모판과 흙을 이용하지만 예전에는 복잡한 절차를 거쳤다. 우선 소금으로 농도를 맞춘 물에 씻나락(볍씨)을 담가 쭉정이를 골라냈다. 소금물을 넣는 이유는 씻나락 쭉정이를 물에 뜨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난 뒤 3~4일 물에 담가둔 뒤 모판에다 고루 뿌린다. 씻나락을 모판에 뿌리는 작업을 ‘씻나락 내린다’고 한다.
 

볍씨 하나가 싹 틔우고/ 이삭을 맺기까지/ 저 혼자 힘으로는 어림없어// 햇볕도 적당히/ 비도 적당히/ 바람도 적당 적당히// 가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태풍이 불어도// 서로 양보하고 힘 합쳐/ 조그만 볍씨 하나/ 알곡을 맺게 한 거야// 엄마 아빠의 칭찬과 꾸지람/ 그 속에 담긴 사랑과 걱정/ 골고루 먹고 자라는/ 우리도 하나의 볍씨인 거야.

‘볍씨 하나’ 전문(박예분)

씻나락은 지방에 따라서는 ‘씨나락’이라고 쓰기도 한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씻나락’이라고 한다. 씻나락은 ‘씨+사이시옷(ㅅ)+나락’ 구조로 이루어진 단어로 볼 수 있다. ‘나락’은 ‘곡식의 알’을 뜻하는 ‘낟’과 ‘알’이 붙어 ‘나달’으로 변했다가 이후 ‘나락’으로 정착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씻나락이 들어가는 대표적인 속담으로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네’를 들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엉뚱한 소리’ 등의 뜻으로 쓰인다. 비슷한 뉘앙스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옛날 어느 가난한 후손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상을 차렸는데 조상귀신이 내려와보니 먹을 것이 너무 없었다. 귀신은 할 수 없이 광에 가서 후손이 아껴둔 씻나락을 까먹었다. 아마도 그 귀신은 광에서 씻나락을 까먹으면서 후손의 가난과 자신의 배고픔에 대해 구시렁댔을 것이다. 그게 전해오면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굳어졌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씻나락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씻나락을 담근 항아리에는 금줄을 쳐 고사를 지냈고, 씻나락을 담아 두었던 가마니는 잡귀를 막기 위해 솔가지로 덮어 두었다. 못자리철을 맞아 문득 옛날 보릿고개가 생각난다.

이재명 논설위원